[펌]계산된 용미당쟁(用美黨爭)의 해악
[펌]계산된 용미당쟁(用美黨爭)의 해악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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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한상진 교수의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비판

/ 김대중 정권에서 한국정신문화원장<1998.12.26-2000.12.22>을 지낸 서울대 사회학과 한상진 교수가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 기자로 가입,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을 정면 비판한 글을 '데뷔작'으로 선보였다 <편집자주>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 이후 그의 실패를 비판한 칼럼의 결정판은 3월 1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김대중 주필의 칼럼, "대북 원맨쇼에 걸린 제동"이 아닌가 한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언론권력의 무모함과 오만함을 넘어 조선일보가 미국을 국내정치에 끌어들여 용미당쟁(用美黨爭)을 선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선일보 주필이 이런 혼탁한 글을 발표하는 것은 이 시대의 비극이자 우리 모두의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청론(淸論)문화 전통에서 멀리 벗어나 버린 이 글의 해악이 실로 걱정스럽다. 이에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써 참을 수 없어 이 글을 쓰는 바이다.

나는 외교 전문가가 아니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과연 실패로 끝난 것인지는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역사는 작용과 반작용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건 부시 행정부는 그들이 선택한 미국의 국가이익을 중심으로 행동할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로써, 그렇다면 우리가 지켜가야 할 국가이익 또는 민족이익은 무엇인가의 질문이 제기된다. 그런데 정작 이런 질문은 던지지 아니하고 어떤 세력이 미국을 끌어들여 이른바 '남남 갈등'의 새로운 도화선 또는 기폭제로 활용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근시안적 게임은 자칫하면 한미(韓美)간의 국민적인 불신과 오해를 자초할 위험 마저 적지 않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어떤 영문인지 김대중 주필의 칼럼을 통하여 이런 위험한 게임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의 새 지도부는 한국의 남남(南南)갈등 사이를 비집고 들어 김대통령의 대북 러시에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것이다. 미국 측 반응의 "가장 심각하고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이 아니라 바로 우리 국내 사정에 있다는 것이다.

"부시는 한국 헌법상 단임인 김 대통령이 1년 남짓 임기를 남기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을 것"이고 "한국 내의 이런 갈등과 우려와 불안"을 십분 고려하여 "대북정책을 한국의 다음 정권과 조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았다는 해석이다. 그런 이유로 부시는 김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봉쇄'했고 '냉동'시켰다는 주장이다. 과연 부시 대통령은 이번 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제치고 그의 대북 정책을 비판해온 보수 여론과 야당의 손을 들어준 것일까?

조선일보는 이런 억측을 기정사실화하고 예민한 쟁점에 불을 붙이고 있다. 나는 여기서 사대주의 논쟁을 재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대신 이런 주장의 사실적인 근거, 즉 타당성을 묻고 싶다. 생각해 보면 위엄을 갖춘 조선일보 간판 칼럼에 주필이라는 사람이 허무맹랑한 억측을 쓰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자칫하면 부시 대통령까지도 심각한 난관에 몰아 넣을 수 있는 이런 주장의 근거가 어디 있는지, 나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유추하기 힘들다. 과연 김주필은 자신의 글에 담긴 독소와 해독을 충분히 이해하고 글을 썼는가? 그러나 그의 주장이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다시 말해 부시 대통령이 2년여 임기를 남겨놓은 김대중 대통령을 제치고 차기정권을 겨냥하여 현재의 대북 포용정책을 봉쇄하려 했다면, 한미 관계는 파란과 시련을 면치 못할 것이다.

불행한 기억이지만 과거 한 때는 우리 젊은 세대 사이에 반미(反美) 감정이 거셌던 적이 있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억압한 군사독재 체제를 미국 정부가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 뒤 미국은 유연한 입장에서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보였으며 이에 따라 미국의 이미지가 개선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다시 미묘한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민주화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국민은 이제 외세에 의한 민족분단과 냉전체제 대신 한반도에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의 기틀을 세우는 작업에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미국 정부가 우리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여 대북 강경 노선을 주문하는 보수 세력과 손을 잡는 모습을 보인다면 결과는 곧 과거 악몽의 재현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문제는 이처럼 한미(韓美)간의 불신과 오해를 부추길 수 있는 주장이 조선일보 같은 거대 신문에서 주필의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언론권력의 숨은 의도와 계산이 있다.

이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상표라 할 수 있는 대북 포용정책을 흔들어 놓고야 말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을 끌어들여서라도 국내 대북 담론의 패권을 잡아보겠다는 것이다. 과거의 정권은 언론이 흔들자 정책의 기조를 바꾸었다. 이들은 이것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며 어쩌면 유사한 목표로 언론권력을 행사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만일 미국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여 대북 강경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주장이 우리 사회 일각에 영향을 미쳐 미국에 대한 불신과 의혹을 키우고, 민족주의 토양 위에서 이것이 반미(反美) 운동으로 이어진다면, 그리고 여기에 북한이 편승한다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실로 복잡하게 꼬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결과적으로 이런 함정과 덫을 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조선일보는 과연 조금이라도 책임을 느낄 것인가? 나는 회의적이다. 이런 의식이 있다면 이런 음험한 글은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조선일보의 계산된 주장에 관하여 뜻 있는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첫째는 미국 정부가 국내 갈등을 비집고 들어와 차기 정권을 겨냥하여 현정부의 대북정책을 봉쇄했다는 주장의 근거를 조선일보가 밝히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예민하고 폭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전화나 항의서한으로 그 근거를 묻는 것은 민주 시민의 당연한 권리다.

둘째로 주한 미대사관이나 미국무성 또는 백악관에 편지를 써서 부시 대통령이 과연 이런 의도로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그의 대북정책에 쐐기를 박은 것인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한미(韓美) 양국민간의 우호와 협력을 위해, 또한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미리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 정부는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조선일보 주필의 주장에 대하여 명확한 입장을 밝히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로 이 글을 가운데 놓고 언론 권력의 메커니즘과 언론 개혁에 관하여 집중적인 토론을 벌였으면 한다. 짧은 글이지만 그 안에는 사대주의 전통과 함께 정보의 왜곡, 언론인의 권력욕망, 시민사회의 파수꾼 역할보다 권력투쟁의 수단으로 변모한 언론매체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점은 현실의 복잡성을 단순하고 감정적인 하나의 잣대, 즉 DJ 지지냐 반대냐로 응축시키는 이미지 보급에 조선일보가 적극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언론권력의 은밀한 계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DJ라는 상징은 화합이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지지자는 매사를 환영하고 반대자는 매사를 거부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이런 현상이 우리 사회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DJ가 잘하면 잘할수록 반대자의 감정은 더욱 상한다는 지적이고 보면 여기에는 우려할 만한 맹목성이 있는 것도 같다. 문제의 칼럼도 정확히 이 기조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국민이 불안하고 걱정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대북문제에 관한 DJ의 '원맨쇼'"에 있다는 진단이다. DJ라는 상징에 원맨쇼라는 딱지를 덧붙여 활용하고 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모든 정책은 비판을 통해 수정보완의 길을 밟기 마련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미국을 끌어드려 DJ 지지냐 반대냐의 이분법으로 남북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DJ를 지지하건 반대하건, 여당이건 야당이건, 좌파건 우파건 서로 주장할 것이 있고 경쟁할 것이 있지만, 고질적인 당쟁의 관점에서 민족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죄악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파가 아니라 국민의 생존과 평화를 기본으로 삼는 마음이며 민족의 화해와 협력은 결코 당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조선일보가 민족의 양심을 대변해 온 정론지라고 한다면 그 주필은 마땅히 한미 정상회담에서 드러난 미국 측의 견해를 경청하면서 또한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국가이익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물었어야 했고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미국을 국내정치에 끌어드려 용미당쟁(用美黨爭)을 선도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 민족적 고뇌의 흔적이라고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의 장래는 어차피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으로 칼럼을 마치는 것을 보고 억장이 무너지는 비애를 아니 느낄 수 없다.

한상진 기자는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며 오마이뉴스 기자로 활동중이다. hansjin@snu.ac.kr

/오마이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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