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가엾은 병아리
너무나 가엾은 병아리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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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집 그림자에 가려 빛이 잘 들지 않는 꽃밭엔 아직 여문 꽃 한 송이도 없어 얼마 전에 심은 서향과 금목서가 문득 품어댈 향기만 잔뜩 기대하고 있지뭐.

수선화 한 송이라도 피어 노란 아침 나팔을 불어준다면 꺼뻑 행복할텐데...기대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생성은 소멸의 다른 얼굴이라지? 그렇다면 소멸도 행복해야 옳을 것인데 오늘 아침 꽃밭에 병아리를 묻을 땐 그닥 행복하지 않더라

"선물이요!" 볼우물을 파며 내민 아이 손에 비닐 봉지가 들려있었어. 속에서 뭔가 부산스럽더라. "우와! 무슨 날인데? 무지하게 고맙다야"
호들갑을 떨었지만 속으로는 '윽! 병아리구나!' 당황했지

3월은 감별된 수평아리들이 대량으로 유기되는(?) 달이잖아. 그냥 버리기는 아까우니까 애들에게 300원 받고 팔아 넘긴 대책 없는 목숨들 말이야. 아이스크림 한 개보다 싼 목숨 값이지. 대개 300원어치만 살고 죽는다는 걸 파는 사람도 알고 아이들도 알아.

작년 이맘 때도 아들 녀석이 병아리를 주워 왔더군. 차바퀴 밑에서 치어죽게 생겼더라며 품어왔는데 눈도 못 뜨고 고개도 못 가누는 꼴이 처음엔 여영 아니올시다야. 짠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순전히 우리 아들녀석 속 상해할까봐 온갖 정성을 다 바쳤지. 한 이불 덮어 키웠다니까.

덕분에 이틀이 멀다하고 이불 빨래를 해야했어. 그래도 옴팍 정 붙이니 이쁘기만 하더라. 단풍잎 닮은 벼슬이 붉은 점 찍은 듯 돋을 땐 야호호! 탄성이 절로 나고, 혼자 뒀다고 삐비비비 군시렁거리면 옆구리에 부리 박고 잠들게도 해주고 말이야.

하찮은 미물이라도 내 마음이 기울면 특별한 의미가 되는 거잖아.
결국은 모든 것이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더러 해

첫 번째 병아리는 아리라고 불리다가 꼬댁으로 개명까지 했어. 목청이 얼마나 칼칼한지 새벽부터 밤중까지 기분만 내키면 하루에 열두번이라도 꼬끼오∼! 꼬끼오∼! 질러대서 온 동네 사람들 원성을 사는 애물단지라니까.

끓는 찌개에 뛰어들어 닭고기 육수를 보태놓기도 하고 잔불 남은 후라이팬에 터억! 올라앉아 졸기도 하며 알콩달콩 장닭이 된 녀석은, 좀 간지럽게 말하면 <특별한 가족>이야. 눈치가 9단은 될 걸.

봄이면 어린이 노리개감으로 팔려
주워온 병아리 정성껏 키워보지만...
탁구공 보다도 작은 생명 가슴아파
아이들 마음 상해하지 않을까 걱정


내가 일어날 기색만 보여도 먼저 일어나서 발꿈치에 따라붙고 앉기 바쁘게 손바닥 위로 달랑 올라앉아 잠잘 채비를 해. 아직 병아리일 적엔 혼자 두면 사람 찾느라고 목 터지게 삐약 삐이약! 숨 넘어가는 소릴 질렀지.

애들 자랄 때랑 똑 같지? 왜 아니겠어. 엄마! 엄마! 울먹이다가도 엄마 모습만 확인하면 다시 편한 잠을 청하는 아이들 모습과 영낙없이 닮았지.
두 번 째 병아리는 쫑아라고 불렸어. 내게 선물한 아이가 붙인 이름이야.

자기가 선물했다는 특권 의식으로 아이는 노크도 없이 내방을 들여다보곤 했지. 아니 내방이라기보다는 병아리방을......
아이는 선물을 매개로 나와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고 믿는 모양이야. 우쭐해하더니만 기어이 다른 애들의 시샘을 자극했어. 또 다른 녀석이 저금통 털어서 두 마리 사다주겠다지 뭐야.

병아리가 약해서 소중히 돌봐야 한다. 두 마리가 되면 두 마리 모두에게 아무래도 소홀해져서 안되겠다..등등 궁색한 변명을 해가면서 간신히 저금통 터는 걸 말렸다니까

쫑아를 키우다보니 꼬댁이랑 여영 다른 모습들이 보이는 거야. 식성도 다르고 성격(?)도 달라(얼척없다 말고 그냥 들어봐)

하루 종일 다다다다 달려다니며 수선을 피우던 꼬댁이와는 달리 쫑아는 내숭이 심해. 안그런 척, 못본 척, 안 먹는 척... 그런데 그게 일종의 우울증 아니었나 몰라. 생쥐도 우울증을 앓는다는데뭘.

물에 빠지면 건강한 쥐는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우울증 걸린 쥐는 아무 노력도 않고 그냥 가만 있어버린다잖아. 그러니 맥없이 죽어버릴 수밖에...
사람이라고 다를 바 없지. 생에 대한 건강한 의욕 없이 시들시들 살아내는 거. 생각만으로도 기운 빠져.

꼬댁이처럼 억척도 아니고 수선스럽지도 않고 발바닥도 덜 따뜻한 쫑아를 어쩌면 이리 수더분한 녀석이냐고 흐뭇해 했으니 세성의 모든 닭들로부터 어이구! 이 인간아!를 들어도 싸.

병아리 주제에 삐약거리지도 않고 내 손바닥 위로만 올라앉아 자꾸 고개를 묻던 쫑아는 아침나절이 다 지날 무렵 마지막으로 뒤척이고 그걸로 그만이야

탁구공보다 작은 생명 하나. 그 생명을 장난감 삼아 기꺼워 했던 건 아니었는지 정수리가 따가웠는데도 나는 뭐라 말해야 내 아들이 맘 상해하지 않을까부터 열심히 궁리하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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