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이 놀던 곳에는 6·25의 상흔이
학이 놀던 곳에는 6·25의 상흔이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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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수 산이야기⑩유학산(839m·경북 칠곡)>



아직도 끝나지 않은 6·25. 6·25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은 낙동강전투를 결코 잊지 못한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낙동강전투에서 국군이 패퇴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어떠했을까? 1950년 전쟁 발발 직후 서울·수원·천안·대전을 인민군에 내준 국군과 유엔군의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은 낙동강 방어선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부터 진해쪽으로 흘러가는 낙동강을 사수하는 전선을 일컫는다. 낙동강에 최후의 전선을 구축한 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그 중에서 왜관 근처 낙동강에서 벌어진 전투와 다부동·유학산에서 치뤄진 전투가 가장 격렬했다.

50여 년이 지난 오늘, 나는 다부동전투의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 때의 젊은이들이 멘 군장 대신 배낭을 메고, 전투화 대신 등산화를 신었다. 철모 대신 등산모를 쓰고, 소총 대신 스틱을 들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들어선다. 50여 년 전 혈육상쟁의 전투에 쓰인 탱크, 비행기, 포, 소총 등이 이름 없이 쓰러져간 젊은 혼을 대신하여 남아 있다. 그러나 비행기나 포 너머로 서 있는 유학산은 말이 없다. 그래서 오늘은 산길을 걸으며 6·25로 죽어간 수만 명의 영혼에게 진혼가라도 불러줄 참이다.

6·25 격전지에서 부른 진혼가


잘 다듬어놓은 등산로에도 봄은 와 있다. 생기를 되찾은 나무, 경쾌한 소리로 흐르는 물, 질컥거리는 땅에는 이미 봄기운이 완연하다. 매서운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러운 바람은 봄을 싣고 온 전령이다.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1950년 여름, 국군과 인민군은 이 가파른 길을 타고 오르면서 고지를 탈환하려고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을 것이다. 지금 들려오는 새들의 노랫소리는 경쾌한 음악이지만, 그 때의 새소리는 먼저 죽어간 영령을 위로하는 진혼가였을 것이다.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함께/
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간간이 '유해발굴지점'이라 쓰인 팻말이 그 때의 아픔을 상기시킨다. 674고지에 오른다. 1950년 8월 13일부터 9월 24일까지 전개된 전투에서 10여 차례를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다부동과 유학산 전투에서만 인민군 17,000여명, 국군 10,000여명이 사망하는 참상이 벌어졌다.

©장갑수

유학산 동쪽 협곡은 대구로 통하는 관문이고, 여기에서 가산과 팔공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대구를 방어해주는 천혜의 진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구가 함락되면 부산의 함락도 풍전등화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낙동강전선과 유학산-팔공산 줄기를 사수하는 일은 인민군이나 국군이나 전쟁의 성패를 좌우하는 바로미터였던 것이다.

다부동전투가 끝난 직후 조지훈시인이 쓴 시 '다부원에서'는 당시의 비참한 현실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울창한 참나무 숲은 가끔 전망대바위에 자리를 내주면서 주변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837고지 또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된 곳이다. 837봉을 지나자 아기자기한 바위와 바위에 걸린 노송들이 운치 있다. 정상의 팔각정도 바라보인다. 남쪽 건너편으로 황학산, 소학산 줄기가 이어지고 그 사이 좁은 논밭을 가로질러 왜관으로 가는 도로가 한적하다.

피의 전장, 낙동강은 유유히 흘러가고


유학산(遊鶴山)은 '학이 노닐 던 산'이다. 고고하고 깨끗함의 상징으로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만 살았다는 학. 그 학이 놀았다는 산이니 아름답지 않을 리 없다. 837봉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는다.

정상에는 유학정이라고 하는 팔각정자가 세워져 있다. 유학정에 올라가 바라보는 풍광은 가히 학이 놀다가 갈 만하다. 대구를 비롯한 영천·경산·군위·칠곡의 정기를 뿜어내는 팔공산의 우람한 모습이며, 가산산성이 있는 가산이 가깝게 다가온다. 그 뒤로 대구시내가 어렴풋하다. 구미시내와 낙동강이 금오산을 등지고 평화롭다.

마냥 평화롭게 보이는 낙동강은 한국전쟁사에 가장 처참했던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그 전투는 1950년 8월 16일에 있었다. 이날 왜관 건너편 낙동강 대안 일대에 인민군 4만 명이 집결, 낙동강을 건너 왜관이 금방 함락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공격을 요청했다.

일본에서 이륙한 B-29 폭격기 98대가 불과 26분만에 퍼부은 폭탄은 무려 960톤. 낙동강을 건너려 했던 4만 명의 인민군 중 3만 명이 이 폭격으로 죽었다. 낙동강은 피로 물들어지고, 그 대가로 낙동강전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 때 그 피의 전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낙동강은 유유하게 흘러가고 있다.
도봉사에 도착하자 쉰길이나 된다는 거대한 벼랑이 위압적이다. 위압적인 바위 아래에 절이 둥지를 틀어 포근한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바위 아래의 좁은 터에서 대웅전, 비로전, 범종루 같은 몇 안 되는 당우가 불심을 지핀다. 절 앞으로 확 트인 전망이 멀리 낙동강의 유유한 모습까지를 끌어안고 있다.

도봉사에서 마시는 석간수가 마음을 씻어준다. 시멘트길을 따라 내려오니 팥재다. 팥재 근처에서 바라본 유학산은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유학산이라는 이름을 알만하다. 저 아름다운 바위에도 6·25의 아픔은 서려 있을 것이다.






▷산행코스
다부동전적기념관(1시간) → 674고지(1시간) → 837고지(50분) → 정상(20분) → 도봉사(20분) → 팥재 (총 소요시간 : 3시간 30분)
▷교통
-. 중앙고속도로 다부교차로를 빠져 나와 우회전하면 다부전적기념관이 있다. 산행은 전적기념관에서 시작된다. 하산지점인 팥재는 다부교차로에서 908번 지방도로를 따라 좌회전하여 달리다가 듬티재에서 도봉사 이정표를 따라 우측길을 따른다.
-. 왜관과 가산면 천평리를 오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듬티재나 다부동에서 내릴 수 있다.

www. chosun.ac.kr/~gs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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