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내몰린 '가압류 인생'
죽음 내몰린 '가압류 인생'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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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이 모였으니 1인당 3억원씩, 모두 15억은 되겠네요."

지난 13일 저녁 전남대 후문 근처의 한 식당에서 동광주병원노조원들이 모였다. 저녁식사를 겸한 자리에서 기자가 대뜸 '오늘 모인 사람들 합하면 얼마나 되냐'고 물었고, 이영주 사무장은 덤덤한 표정으로 이같이 답했다.

노조측은 지난 10일 광주지법에서 열린 민사1심 선고에서 '노조측은 원고인 사용자측 5인에 대해 각각 5억원씩, 모두 25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로 손해배상액 6억원을 포함해 모두 31억원을 떠안게 된 상태였다.

"로또복권이라도 맞지 않는 이상, 평생 만져 보기도 힘든 돈이지요. 요즘은 파업만하면 사업주들이 남발하는데, 어쩌면 동광주노조가 그 전주곡이었는지 몰라요."

천문학적 액수의 손배소송과 재산가압류는 동광주병원노조 뿐만이 아니다. 캐리어사내하청노조, 그리고 목포가톨릭병원노조 등 이 지역에서 노동문제가 불거진 중대형 사업장 치고 손배소송이나 가압류가 걸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리고 손배와 가압류는 끝내 두산중공업의 한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아가기에 이르렀다.

손배 및 가압류는 지난 2002년 김대중 대통령이 "구속만이 능사가 아니다"면서 "불구속 기소나 민사소송 등 다양한 방법을 검토하라"는 지시 이후 사업주들이 노조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통제방법으로 애용하게 된 것.

민주노총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1월말 현재 총 50개 사업장에서 진행중인 손해배상 및 가압류청구액수가 모두 모두 2천222억 9천여만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신종 연좌제에 노동자 가족까지 피해
사업주의 노동탄압 도구로 악용돼
노동계와 법조계의 개정움직임에 기대


고통은 노조원들만의 몫이 아니다. 노조의 간부가 아닌 일반노조원은 물론이고, 입사당시 재정보증인을 섰던 가족과 친지에 대해서도 부동산 및 임금채권에 대한 가압류를 거는 '신종 연좌제'가 각 사업장의 공통점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동광주병원노조원 문선미씨 역시 '신종연좌제'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제 퇴직금에 가압류가 걸려있구요. 병원 입사할 때 아버지가 재정보증인이 됐는데 지금은 집이 가압류에 걸려 재산권을 전혀 행사 할 수 없는 상태예요."

이렇게 가족과 친지로 확산되는 손배 및 가압류는 '노조활동 = 패가망신'의 등식을 확산시키며 노조를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한 개인의 삶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 역시 거대한 자본 앞에 가압류로 묶여버렸고, 노동자들은 사업장에서 근무하면서도 파업하면서도, 그리고 파업 이후에도 거대한 자본 앞에 끝없이 고통받는 작은 존재임을 확인하고 있다.

최근 언론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투쟁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노동계와 함께, 법조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이 모색되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회장 최병모)은 곧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마련해 입법청원 또는 의원발의 한다는 계획이다.

민변 노동위원회의 권두섭 변호사는 "현재 법으로는 노동자들이 합법적 파업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라며 "때문에 불법 파업에 가압류와 손해배상, 형사처벌이 자동으로 따라오면서 노동자의 권리가 철저히 훼손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개정안에는 노동쟁의의 해석 폭을 넓히고, 쟁의행위가 폭력이나 파괴행위가 아닌 이상 사용자가 쟁의행위로 인한 영업손실 등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역사회의 시민단체, 정치인들이 나섰지만 사업주의 완강함에 아무런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3년을 끌어온 동광주병원노조. 법제화와 그에 따른 조치를 통해 조합원들과 그들 가족친지들의 삶에 덧씌워진 가압류를 풀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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