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떠난 침묵의 공간은 쓸쓸
아이들 떠난 침묵의 공간은 쓸쓸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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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떠난 골목과 마을 공터와 학교 운동장은 쓸쓸하다. 그곳은 마치 시신처럼 견고한 침묵의 공간이다. 이 침묵의 혈관에 푸른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아이들의 재잘거림이며 환성이며 때론 서로의 다툼으로 터뜨리는 작은 훌쩍거림이다. ©마동욱


아이들은 지금 놀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교육이 기득권 유지나 신분상승의 유력한 수단으로 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아이들은 놀 틈이 없다. 그들은 학원의 딱딱한 칠판이나 과외가 지시하는 죽은 지식의 카타콤으로 실종한다. 단지 오늘, 아이들이 논다는 것은 어둡고 칙칙한 방안으로 처벌되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컴퓨터 게임이나 자본이 제공하는 잘 포장된 장난감을 향유한다. 그것은 화폐로 실현한 '현실적인 완전성'이며 그것이 충족되면 곧 새로운 완전성을 향해 욕망을 방목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놀이에는 자신의 땀과 정성으로 만들어가는 창조의 과정이 없다. 오직 돈으로 구매한 놀이, 소비와 파괴의 과정만이 그들을 지배한다.

현재 30대 중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의 어린 날만 해도 놀이 기구는 길가에 구르는 돌맹이 이거나 아니면 제 손으로 직접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부러진 쇠 톱날과 무딘 연필칼로 베인 손가락을 입으로 쪽쪽 빨아가며 자치기와 나무칼과 대나무 물총과 썰매를 만들었다. 그때 낭자한 유혈이 처절히 베인 놀이기구들은 얼마나 소중하고 가슴 뿌듯한 자기성취의 재산이었던가! (당시 놀이기구를 잘 만드는 마을의 형들은 우리들의 걷잡을 수 없는 위대한 영웅이었다)

©마동욱
그 놀이기구를 만들며 원재료의 재질을 파악하고 놀이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형태를 만들기 위해 짱구를 굴리고 또 굴리기를 거듭하곤했다. 예컨데 자치기를 만들려면 어떤나무가 적당한가 그리고 어미자와 새끼자의 비율은 얼마로 했을 때 가장 편리한가 (개인적인 체험으론 탱자나무가 좋으며 5 : 1의 비율이 적당하다) 등과 같은.

부모욕심 하나 때문에 학원으로 강제소환
과외허덕 새싹들은 놀틈 조차 없이 시달려


놀이는 아이들의 풍요로운 교실이었다. 비석 맞추기를 하며 거리감각과 몸의 평형감각을 익히고 자치기를 하며 각자의 역할 분담과 덧셈 뺄셈 나눗셈을 자연스럽게 공부했다. 또한 대나무 물총으로 기다란 물총알을 발사하며 유속과 단면적의 관계를 드러내는 연속방정식과 같은 유체역학의 기본 원리를, 팽이를 치고 돌리면서 회전과 관성의 관계를 나타내는 각운동량 보존의 법칙 등을 실현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와 함께 양보와 타협으로 놀이의 룰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고 책임지는 자세와 태도를 배웠고, 놀이라는 것이 혼자서는 불가능했음으로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두 '나들'인 동시에 두 '너들'이 되는 변증법, 즉 너를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호명하는 소중한 계기를 마련해 왔다. 이를테면 거친 땅바닥과 구르는 돌과 부러진 막대기가 그들의 칠판이며 교과서며 연필이었으며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서로 최초의 생을 공유하고 나를 초월하여 너를 향해 활짝 열리는 투명한 창문을 학습하고 준비해 왔던 것이다.

©마동욱
아이들이 떠난 골목과 마을 공터와 학교 운동장은 쓸쓸하다. 부모들의 욕망에 피검되어 학원의 강의실과 과외에로 강제 소환되고 기소된 아이들, 컴퓨터와 자본이 제공한 식은 플라스틱 장난감이 어지럽게 흩어진 어둡고 칙칙한 방안으로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아이들을 이제 골목과 공터와 운동장으로 불러내자. 그곳에서 대양을 유영하는 은빛의 물고기 떼처럼 저 죽음과도 같은 침묵의 공간에 신선한 피와 뜨거운 숨을 불어넣는 무수한 난무이게 하자.

아이들은 어른들이 함부로 강제하거나 침해할 수 없는 미래의 시간이다. 그리고 놀이 혹은 논다는 것, 그것은 아이들의 천부적 권리이며 그 누구도 박탈할 수 없는 스스로 가꾸고 꽃피어갈 그들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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