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의 발자국마다 쪽빛 그리움이…벽방산
고승의 발자국마다 쪽빛 그리움이…벽방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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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수 산이야기 ⑥-벽방산(650m·경남 통영·고성)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리움이 솟구친다. 그 그리움은 가슴속에 담겨있는 고향이기도 하고, 보고싶은 옛 연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리움은 우리의 마음을 풍족하게 해준다. 특히 겨울바다는 다른 계절보다도 그리움이 간절하다.

나는 지금 벽방산 정상에서 발 아래로 펼쳐지는 쪽빛 바다를 바라보며 그리움에 젖어 있다. 고성 들판이 있는 북쪽에서는 옛 가야의 혼이 실려온다. 마한, 진한과 비슷한 시기에 건국되어 562년 신라에게 멸망하기까지 독자적인 문화와 주체적인 역사를 이루어왔던 가야연맹. 그 가야는 전기에는 오늘날 경상남도 해안지역인 김해, 고성지역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소국으로 성장하였고, 후기에는 고령과 함양 등 내륙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가야연맹 중 소가야의 중심지로 알려진 고성에는 크고 작은 고분들이 1천 5백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해오고 있다.

고성읍에 도착하자 남쪽으로 벽방산이 우뚝하다. 우뚝 선 벽방산은 고성과 통영을 가르고 있다. 안정사주차장에 내려서니 벽방산과 천개산이 골짜기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봄을 기다리는 계곡가에 안정사가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안정사는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한때는 전국 굴지의 사찰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작고 가난한 절일 뿐이다. 절을 감싸고 있는 적송 숲의 운치와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천개산의 의젓함이 안정사의 허실한 모습을 보완해 준다.

적송이 추는 군무가 언 땅을 녹이고


한반도 남단에 위치한 안정사에서는 이미 봄기운이 느껴진다. 대웅전 앞마당에 아지랑이가 아롱거리고 따스한 햇살에 건물들이 졸고 있다. 안정사를 떠나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하는데, 적송 숲이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가져다준다. 활엽수들이 옷을 벗어버린 겨울철에 가장 돋보이는 나무는 뭐니뭐니해도 소나무다. 안정사 뒷편에서 붉은 줄기의 적송이 우리를 관객 삼아 집단으로 춤(群舞)을 추고 있다. 춤추는 소나무 숲을 걷고 있는데, 가섭암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나의 가슴을 파고든다.

의상암이 가까울수록 아름드리 적송과 느티나무, 소사나무들이 격조를 높인다. 암자가 있는 곳에는 무언가 다른 분위기가 있는데, 나무들 역시 그렇다. 그런 점에서 보면 주위의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까지도 모두 절 집인 셈이다.

663년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의상암은 현판 위의 기와가 떨어져나가고 서까래까지 썩어버린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가난한 암자에서 겨울나기가 힘들었던 탓일까? 먼지 쌓인 흰 고무신만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뿐 스님 없는 의상암에는 새들이 염불을 대신해주고 있다.

의상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의상선대를 지나 암봉에 오른다. 불쑥불쑥 솟은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암봉에 서자 비로소 그리운 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거제도와 한려수도가 아름답고, 부산 앞 바다까지 펼쳐지는 진해만이 잔잔하다.

여기에서 정상을 거쳐 천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자연스럽다. 고성읍이 한눈에 내려 보이고, 주위의 들판이 평화롭다. 부드러운 능선을 걷다보니 금방 정상에 도착한다. 거제도와 육지 사이에 넓게 펼쳐진 진해만이 동쪽에서 눈부시게 반짝이고, 서쪽으로는 남해와 거제도 사이에 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큰 섬 거제도는 높은 산줄기들이 이어져 섬이라기보다는 반도와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남쪽으로는 통영시내와 통영항이 미모를 뽐낸다. 그리고 통영 미륵도의 미륵산이 우뚝하고 그 뒤로 한산도가 고개를 내민다.

윗섬과 아랫섬으로 이루어진 사량도의 지리망산과 칠현산은 바다에 떠 있는 아름다운 배 두 척이다. 사량도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욕지도는 바다 한 가운데에 뜬 등대다. 서쪽으로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남해도는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내의 모습이다. 벽방산에 올라 바라보는 한려수도와 출렁이는 물결 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한편의 그림이다. 이 그림 속에는 그리움과 정다움이 담겨 있다.

벽방산은 불가에서는 바리때(스님의 밥그릇) 발(鉢) 자를 사용하여 벽발산(碧鉢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남쪽으로 단애를 이룬 벽방산 정상 봉우리는 그 모양이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올 때 현세의 부처인 석가모니불이 준다는 벽발을 가섭존자가 받쳐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벽발산이라고 부른다.

맑고 편안함은 원초적 그리움


그래서 그런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산이건만 벽방산에는 안정사를 비롯하여 가섭암, 의상암, 은봉암, 천개암, 사자사 등 6개의 사암이 둥지를 틀고 있다. 한때는 10여 개의 사찰이 산내에 있었다고 하니 벽방산은 가히 불가의 산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정상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서 안정치로 하산을 한다. 남쪽으로 웅장하게 솟구친 바위가 장관이다. 돌과 나무의 대비가 자연스럽고 신비롭다. 돌과 나무는 흙, 물과 함께 생태 환경의 근원이다. 그래서 돌과 나무 속에는 생명과 역사의 의미가 투영되어 있다. 심지어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천개산에 올라서자 거제와 통영이 지척이고, 바다에서 출렁이는 파도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천개산에서 본 벽방산 바위 봉우리의 모습이 어느 방향에서 볼 때보다 장엄하다. 바다를 바라보며 그리움에 젖어 있다가도 벽방산을 보면 진리를 쫓는 수행자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한 산자락에 위치한 저 아래의 안정사를 바라보며 가파른 길을 내려선다. 그리고 은봉암을 만난다. 천개산 8부 능선쯤에 자리잡은 은봉암은 조그마한 암자지만 산내 사찰 중에서는 가장 정갈하고 신선하다.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은봉암에는 7m 정도 높이의 칼 같이 날렵한 바위가 극락보전 지붕과 맞대어 서 있다. 옛날 이곳에는 자연석 세 개가 있었는데, 첫 번째 것이 넘어지면서 해월선사가 나타나고, 두 번째 자연석이 쓰러지면서 종렬선사가 도를 통하였다. 그 뒤 이 돌들을 성석이라고 불렀는데, 그 중 한 개만 남아 도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안정사주차장에서 바라보는 벽방산 정상과 암봉, 그리고 천개산이 마치 득도한 선승 마냥 맑고 편안하다. 맑고 편안함은 원초적인 그리움의 대상일 터. 그 그리움을 안고 공룡발자국을 만나러 상족암으로 향한다.


*산행코스
-. 제1코스 : 안정사주차장(40분) → 의상암(10분) → 암봉(30분) → 정상(20분) → 안정치(20분) → 천개산(15분) → 은봉암(30분) → 안정사주차장 (총소요시간 : 2시간 45분)
-. 제2코스 : 안정사주차장(40분) → 의상암(10분) → 암봉(30분) → 정상(20분) → 안정치(15분) → 은봉암(30분) → 안정사주차장 (총소요시간 : 2시간 25분)

*교통
-. 남해고속도로 사천나들목을 빠져 나와 사천읍에서 33번 국도를 타거나, 마산에서 2번 국도와 14번 국도를 따라 고성읍까지 와서 율대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1009번 지방도로를 따라 안정사까지 간다.
-. 통영시외버스정류장 앞에서 운행되는 안정리행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안정리에서 내린다.
www.chosun.ac.kr/~gs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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