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길…도통하는 길
자연의 길…도통하는 길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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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수 산이야기- (5)구수산·갓봉(351m·344m, 전라남도 영광)

"장 많이 보았능게라."
"생선도 좀 사고, 아그덜이 좋아하는 것도 사고 그랬제."
설날을 며칠 앞두고 있어 명절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군내버스는 만원이다. 장꾼들의 사투리와 왁자지껄한 대화가 구수하고 차창 밖의 농촌풍경이 정겹다. 바깥 날씨는 제법 쌀쌀한데, 버스 안은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하다. 영광읍에서 백수로 가는 버스는 낮은 산과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다 쉬기를 반복한다. 버스는 어느새 헐렁해졌다. 내릴 시간이 다된 모양이다. 버스는 백수읍 백수우체국 근처에 나만 혼자 남겨두고 금방 사라져버린다.

'삽촌마을' 표지석 뒤의 '갓봉 등산안내도'가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키 작은 소나무가 도열해 있는 야산을 혼자서 뚜벅뚜벅 걷는다. 홀로 걷는 것은 결국 같이 가기 위한 것.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과 바람직한 관계를 맺기 위함이다. 이는 내 가슴속에 긍정적인 생각을 키우고, 긍정적인 생각 속에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존중하는 마음이 자리잡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산 속에서 혼자 있을 때의 긍정적인 생각은 막상 현실에 부딪치면 자꾸만 빗나가버린다. 그러한 나를 산이 붙잡아준다.

쓸쓸한 마을과 허전한 겨울바다

드넓게 펼쳐지는 서해바다가 시원하고, 백수읍 너머로 넓은 겨울들판이 황량하다. 소나무 아래에서는 명감나무, 망개나무로도 불리는 청미래덩굴 열매의 빨간 모습이 고혹적이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낙엽 위로 고개를 내민 춘란이다. 봄을 기다리는 춘란은 꽃을 피우기 위하여 자꾸만 꽃대를 올리려고 하는데, 날씨는 춘란의 성급함을 나무라는 듯 여전히 쌀쌀하다.

갓봉에 올라서니 시원스러운 전망대바위가 있다. 전망대바위에 서는 순간 귓가에서는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닷물이 하얀 포말을 만든다. 드넓은 바다에는 꼬막껍질을 업어놓은 것 같은 작은 섬들이 드문드문 떠 있다. 가깝게는 칠산도, 송이도, 각이도 같은 섬들이 수석처럼 보이고, 멀리는 남서쪽으로 낙월도와 지도, 임자도가 까마득하다.

영광지방의 낮은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은 물론이다. 북쪽에서는 잠시 후 밟게 될 구수산 능선이 꿈틀거리고, 동으로는 불갑산(516m)에서 장암산(483m), 태청산(593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들이 영광과 함평, 장성의 경계를 이루며 하늘금을 긋고 있다. 남쪽에서는 군유산(403m)이 함평과 구획을 나누고 있다.

산 위로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다. 파도소리에 해안도로는 졸고 있고, 지나는 배도 없는 겨울 바다는 허전하기만 하다. 곧은 성질을 가진 소사나무가 바위근처에서는 구불구불한 곡선미를 자랑한다. 그래서 소사나무는 분재용으로 애용된다.
봉화령(374m)에 도착하자 북쪽으로 법성포가 살짝 고개를 내민다. 법성포는 굴비로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가 유입된 곳이다. 그 뒤로 선운산과 변산반도가 어렴풋하다.

북쪽 능선으로 가는 길은 확실하게 정비되어 있으나 북서쪽인 구수산 가는 길은 좁고 희미하다. 길에는 눈이 남아 있지만 사람 발자국은 없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에는 야생동물의 발자국이 나 있다. 어쩌면 이 길의 주인은 야생동물인지도 모른다. 한참을 걷는데도 야생동물의 발자국은 계속된다. 어느새 이런 발자국이 친근해지고, 친구처럼 가까워진다.

수종은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같은 활엽수가 주종을 이루고 가끔 소나무가 푸름을 과시한다. 잿빛의 겨울 나무에 소나무의 녹색이 어울려 조화를 이룬다. 같은 성질을 가진 집단보다는 이질적인 집단이 섞여 조화를 이루면 그 모습은 훨씬 아름답다.

소태산이 원불교 창시한 터

눈이 없는 곳에는 낙엽이 푹신하다. 푹신하게 쌓인 낙엽이 싸늘한 겨울 나무들을 푸근하게 해준다. 토끼 한 마리가 사람 발자국 소리에 놀랐는지 후닥닥 뛰어간다. 울창한 숲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무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과 그 제자들도 이 길을 걸으며 도(道)를 닦았는지도 모른다.

구수산 정상에 올랐지만 나목(裸木) 사이로 주변 산만 보일 듯 말 듯하다. 수행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보일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이듯이. 구수산(九岫山)은 아홉 봉우리라는 뜻으로 중앙봉, 눈썹바위봉, 밤나무골봉, 서래바위봉, 상여봉, 옥녀봉, 장다리봉, 대파리봉, 천기동뒷산봉을 일컫는다. 조금 내려와 영산성지를 바라본다. 이곳은 소태산 박중빈이 태어나서 도를 깨우친 후, 원불교를 창시하여 교리를 전파한 곳이다. 영광읍과 영광 근처의 너른 들판도 펼쳐진다.

삼밭재에서 100m쯤 산자락을 돌아가니 '삼밭재기도실' 편액이 붙은 집 한 채가 자리잡고 있다. 학생들로 보이는 젊은이들과 합장을 하고 인사를 나눈다. 기도실 옆에는 널따란 마당바위가 있다. 소태산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의문을 품고 11세부터 5년간 산신을 만나기 위하여 이곳 마당바위에 올라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돌에 그려진 일원상(○)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서래바위봉에 올라서자 법성포가 바로 아래에 와 있다. 소태산이 간척한 농지인 정관평(貞觀坪)과 간척지 위에 옛 섬이었던 소드랑섬이 솟아 있다.

옥녀봉 자락에 소태산이 태어났던 생가가 있고, 소태산의 아홉제자를 상징하는 의미로 건물을 아홉 칸으로 지었다는 원불교 최초 건물인 구간도실(九間道室)터가 있다. 소태산 대종사가 진리를 깨달은 대각지에 세워진 만고일월(萬古日月)비에 눈길을 멈춘다. 그리고 입구에 세워진 조병화의 시 '만고일월'을 음미한다.

이 바람 부는 산천에서 / 얼마나 적막했길래 / 만고일월이라 했을까 // 실로 세월은 만고일월 / 일체만물이 흥망과 성쇠 / 명멸로 이어지며 / 그 허망을 산다 // 오, 생존이여 / 가련한 먼지여 // 희로애락은 / 인간이 느끼는 바람일 뿐 / 어찌 그것을 영원이라 하리

*산행코스
-. 제1코스 : 삽촌마을(1시간) → 갓봉(20분) → 모재봉(40분) → 봉화령(40분) → 327봉(1시간) → 구수산 정상(20분) → 삼밭재(1시간) → 옥녀봉(20분) → 영산성지 (총소요시간 : 5시간 20분)
-. 제2코스 : 삽촌마을(1시간) → 갓봉(20분) → 모재봉(40분) → 봉화령(1시간) → 가자봉(1시간) → 덕산마을 (총소요시간 : 4시간)
-. 제3코스 : 영산성지(30분) → 삼밭재(30분) → 구수산 정상(20분) → 삼밭재(1시간) → 옥녀봉(20분) → 영산성지 (총소요시간 : 2시간 40분)

*교통
-. 영광은 서해안고속도로 영광나들목을 빠져 나오거나 광주에서 22번 국도를 타야한다. 영광읍에서 22번 국도를 왼쪽으로 돌아 844번 지방도로를 따라 15분 정도 달리면 백수읍이 나온다.
-. 영광읍까지는 서울, 광주, 전주에서 다니는 고속 및 직행버스가 수시로 있다. 영광버스터미널에서 백수 가는 버스가 1일 9회 있다.
www.chosun.ac.kr/~gs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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