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손'으로 왕희지를 쓴다
'기름손'으로 왕희지를 쓴다
  • 이광재 기자
  • 승인 2001.03.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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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하는 '자동차 수리공' 전홍근씨 5년전 시작한 서예...국전입선도 "먹물 묻혀 젖히면 칼질 같은 쾌감" 힘든 시절 배운 무술실력으로 자율방범 자동차수리 서예 무술 통하는게 있어요 도로 모퉁이에 자리한 자동차 부품 가게. 기름때 묻은 손장갑과 정비도구. 자동차 두 대가 들어가면 딱 맞을 작업공간과 거기에 딸린 컨테이너 박스. 전홍근씨(49)는 그 박스 안에 있었다. 직원 한 명을 거느린 명색이 사장인 그가 운영하는 정비업체 상호는 '광홍부란자'(광주시 북구 중흥1동). 일반인에겐 낯선 부란자(plunger- 매연이 많이 나면 반드시 점검해야할 경유차 부품)만을 전문적으로 고치는 업소다. 자동차 정비에 손댄지는 17년. 정비업계에선 알려질만큼 알려진 정비공이다. 그러나 그가 스패너와 드라이버 대신 틈만나면 붓을 쥐는 서예가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컨테이너 박스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전씨의 사무실이자 작업실인 컨테이너 박스엔 풋풋한 묵향이 가득하다. 마흔 한 살에 처음 잡은 붓이 친한 친구들마저 소원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이제 놓을 수가 없다고 한다. "성격이 급해서 그걸 좀 고쳐 보려고 시작했지요. 그런데 그만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낮엔 자동차 정비를 하고 밤이 되면 서예학원에 다녔다. 평일엔 서너시간, 일요일엔 아예 학원에서 살았다. 늦게 시작한 것이라 더욱 오기가 났을까. 그는 해서체만 고집스레 5년을 썼다. 그동안 국전에 출품해 특선도 하고 민전에서 3차례 입선했다. "부드러운 털에 먹물을 묻혀 젖히다보면 마치 시원스런 칼질과도 같은 쾌감을 느낍니다. 잘은 모르지만 세상의 비틀어진 곳을 바로잡고 어두운 곳을 비추는 기사를 쓰는 기자도 그런 느낌이 아닐까요" 요즘은 주로 왕희지나 안진경의 비문을 주제로 쓴다. "비문의 내용은 대개 가족사항에 관한 것들이지만 옛사람들의 글씨는 인간의 모든 형체와 딱 맞아 떨어져요. 때문에 글씨를 오래 쓰다보면 인상과 관상에 대해 어느정도 식견을 갖추게 됩니다." 중흥 1동 새마을 금고에는 전씨의 작품이 걸려있다. '海不良水(해불양수)' 바다는 좋은 물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 자신이 넓으면 모든 것이 나에게 온다는 뜻이라 한다. 손님을 대하는 전씨의 마음이다. 좌우명을 묻자 글씨 쓰듯 손가락을 휘저으며 '德不孤(덕불고)'라 한다. 덕이 있으면 결코 외롭지 않단다. 전씨가 살아온 내력을 듣고서야 그 좌우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담양이 고향인 전씨는 부모가 일찍 떠나 세살때부터 작은 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중학교 때 배운 태권도 덕에 광주상고에 진학하지만 낯선 도회지 생활에 외로움은 더했다. 숙식은 국술원 사범을 맡아 체육관에서 해결했다. "그땐 가족이 그리운게 아니라 가족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웠습니다. 모든게 힘들었던 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태권도였습니다." 전씨는 7년간 태권도 사범을 했지만 운동을 직업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중 공업사에서 부란자 일을 배우게 됐고 85년 국비로 '일본 디젤키키'라는 부란자 제조회사로 연수를 가게 된다. "당시엔 이 부품을 고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성공을 확신했습니다. 앞 뒤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주변에선 이것 저것 고치면 돈도 많이 벌수 있다고 권했지만 성격이 그리 되지 못해요. 지금도 부란자만 손을 보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 자신을 버티게 한 운동 역시 잊지 않았다. 현재 특공무술 7단에 국제호국무술연맹의 총재직을 맡고 있다. "제가 하는 자동차 수리, 서예, 특공무술 모두가 전혀 다르지만 나름대로 통하는 게 있어요. 엔진소리만 듣고도 뭔가를 가늠하고, 먹물의 강도와 농담을 조금씩 터득하고, 상대방의 몸짓에 따라 반응하는 것들이 다 같은 것 아닙니까." 89년부터는 중흥1동 자율방범대 활동을 시작했다. 광주역 근처에서 순찰을 돌다 마지막 기차를 놓친 사람과 노숙자들에게 몇만원씩 쥐어주기도 한다. 소년소녀 가장과 독거노인에도 손길을 내민다. "내가 워낙 힘들게 커서, 이런 사람들을 돕고 싶었어요. 고생을 해 본 사람은 알아요." 전씨를 만나고 나오면서 근처 역전파출소에 들렀다. 다짜고짜 "저기 부란자 아저씨 어떤 사람이예요"하고 묻자 파출소장의 답은 간결했다. "평범한 이웃 아저씨, 내면이 꽉 찬 사람, 결코 흔치 않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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