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진정 시대를 뛰어넘는 화두인가?
개혁, 진정 시대를 뛰어넘는 화두인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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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예종의 개혁에 대한 욕망과 좌절을 중심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900여 년 전(1105년), 고려의 제16대 국왕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 직후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생각건대 우리 조종(祖宗: 태조 왕건)께서 나라를 처음으로 세우신 이후 여러 성군(聖君)들이 받들어 지켜 과인(寡人)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 여러 도(道)와 주군(州郡)의 사목(司牧)으로서 청렴하며 백성을 구휼하고 근심하는 자는 '열에 하나 둘도 없고(十無一二)', 오히려 이익을 쫓고 명예를 구하는 데에만 힘써 (백성을 다스리는) 큰 체통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뇌물을 좋아하고 자기 이익만을 꾀하며 백성에게 해를 끼쳐, 집을 떠나 도망하는 백성이 서로 이어 '열 집에 아홉은 비었다(十室九空)'고 하니, 짐은 심히 마음이 아프노라. 마땅히 명망있는 신하를 보내어 군·현을 순시하고 수령의 잘·잘못을 상고(詳考)하여 알려라. "청렴한 관리는 열에 하나 둘도 없고, 도망간 백성으로 인해 열 집에 아홉이 비어있다"는 표현에서, 당시 백성들이 겪고 있던 고통과 질곡이 쉽게 짐작된다. 예종은 처음부터 이라는 역사적 부채를 안고 왕위에 오른 셈이었다. 예종은 숙종(肅宗)의 아들이다. 숙종은 고려 최대의 외척세력인 인주이씨 출신의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진압하고 어린 조카 헌종(獻宗)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숙종은 당시 고려의 사직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공적·사적 무사집단과 일부 관료집단의 지원을 받아, 일종의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그 사건의 전말은 조선시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과정과 거의 비슷하다. 숙종은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을 한 탓에 종실내부나 외척세력의 왕권에 대한 위협을 항시 걱정해야만 했다. 이에 숙종은 한편으로는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경제적 권한을 약화시키는 강권통치를 펼쳐나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세자의 지위를 보강하는 데에 힘썼다.
예종은 부친의 도움으로 세자로서의 지위를 강화시킬 수 있었고, 성년이 되어서 세자시절을 보낸 까닭에, 즉위 초부터 어느 정도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예종의 주변에는 세자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인물을 중심으로 두 부류의 참모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증 한 부류는 한안인(韓安仁)·이영(李永) 등을 대표로 하는 젊은 학자들인데, 이들은 대부분 당대에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지방 출신의 청렴하고 강직한 신진세력이었다.

다른 한 부류는 도가(道家) 이중약·처사(處士) 곽여·술사(術士) 은원충·선승(禪僧) 탄연과 같은 인물들로써, 현실 정치와 거리가 먼 소위 <아웃사이더>들이었다. 이들 양세력은 모두 젊어서부터 서로 친밀한 교분을 갖고 있었으며, 예종의 세자시절을 함께 보필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예종의 즉위와 함께 크게 득세했으며, 특히 예종의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예종은 즉위 초부터 국학진흥에 힘썼다. 그 목적은 새로운 인재의 양성에 있었다. 당시 고려는 지방관의 가렴주구·계속되는 자연재해와 질병·여진과의 전쟁 등으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고, 그 결과 지방사회는 '十室九空'할 정도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료는 대체(大體)를 잃고 '謀利害民'에 앞장섰다. 이에 예종은 국학을 진흥시켜 대체를 갖춘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여 당시 고려가 처한 모순을 극복하려 하였으며, 구체적으로 7재와 청연각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고급관료들은 예종의 국학진흥책에 무관심하였다. 이에 예종은 자신의 정책을 적극 지원해 줄 측근세력이 필요했으며, 예종의 세자시절 스승이었던 한안인과 곽여가 그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안인은 청연각에서 경연을 주도하였고, 능력있는 인재의 발탁에 앞장섰다. 곽여 또한 궁궐 내의 거처에서 예종과 잦은 주연을 통해 중요한 정치적 자문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예종은 지리도참사상을 이용하여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도교의 진흥에 힘썼다. 그 결과 도관 복원궁이 설치되었으며, 초재와 같은 각종 도교행사도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이러한 도교진흥에는 예종의 세자시절 요좌이며 한안인의 사위인 이중약의 역할이 컸다. 이중약은 도가이면서 의술에 밝았다. 당시 자연재해와 질병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료사업의 확충이 필요하였고, 이중약의 뛰어난 의술은 큰 힘이 되었다. 예종 스스로도 의약에 관한 조예가 깊은 탓에 이중약은 큰 신임을 얻었다. 한편 은원충이라는 술사도 궁궐 신축 등 중요한 정책결정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예종은 자신의 시대적 소임이 외척세력과 고급관료를 중심으로 야기된 사회적 모순과 부패를 척결하는 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친 숙종이 비정상적 왕위계승을 한 탓에 현실정치의 기반이 취약한 약점을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오랜 세월동안 고려왕조의 외척세력으로 자리잡은 인주이씨 출신 이자겸(李資謙)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예종은 늦은 나이에 혼인하였고, 왕자의 생산도 늦었다. 때문에 자신의 뒤를 이을 세자의 지위를 강화하고 안전하게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필요하였다.

이에 인주이씨 출신인 이자겸을 정치적으로 지원해 주기에 이른다. 인주이씨는 고려 누대의 외척으로서 큰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즉, 인주이씨가 누린 권력의 원천은 근본적으로 고려 왕실에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고려 왕실의 안전한 보전에 어느 누구보다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예종은 이자겸을 중용하게 되었고, 이자겸은 당시까지 거의 정치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가, 예종의 총애에 힘입어 급성장하게 되었다.

예종의 개혁정치가 종국적으로 실패하게 된 배경은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정치세력을 자신의 참모로 활용한 데에 있었다. 우선 한안인을 중심으로 한 참모세력은 대부분 당대에 과거를 통해 진출한 인물들이었고, 강직하여 대간(臺諫)의 직에 속해 있었다. 또한 이들은 문행(文行)을 중시하고 청렴한 성품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고려사회에서는 문행을 중시하고 '불사생산(不事生産: 돈벌이를 일삼지 않음)'하는 청렴한 관료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분위기는 한인인 세력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데 크게 도움되었다. 그리고 예종의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도덕적 뒷받침이 되었다.

이와 달리 이자겸의 주변 세력은 대체적으로 크게 부패하였고, 이로 인해 사회적 지탄을 받은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선 이자겸은 "참소를 믿고 이득을 즐기며 田土와 第宅을 치장하여 전답이 연달아 있고 집 제도가 사치스러웠고, 사방에서 뇌물로 바친 고기가 남아돌아 썩는 고기가 늘 수만 근"이었을 정도로 부패했다.

그리고 이자겸의 어머니는 "욕심이 많아 상인에게서 물건을 사고는 그 값을 제대로 주지 않았고, 노비를 풀어서 횡포한 짓을 일삼았으므로, 그녀가 죽자 상인들이 서로 축하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들은 "경쟁적으로 고급 주택을 건축하여 길거리에 죽 뻗쳐 있고, 뇌물을 공공연히 주고받으며, 그 종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노복들 또한 "지방 주군에 흩어져서 서로 재물을 많이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 이러한 몇 가지 사례는 이자겸과 그 측근세력들이 어느 정도 부패하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고려 조정의 중심축으로 자리잡고 있던 한안인 세력과 이자겸 세력은 이처럼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 세력이었다. 예종은 집권 초반 당시 고려사회가 안고 있던 현실적인 모순, 즉 지방관의 가렴주구·자연재해·질병 등으로 인해 '十室九空'에 이른 지방사회의 피폐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안인 세력을 크게 지원하였다. 그러나 예종대 후반기에 들어 예종이 세자의 지위강화와 안전한 왕위계승을 위해 이자겸 세력을 지원하게 된다.

이로써 양세력은 정치적으로 크게 갈등을 겪게 된다. 이들 양세력의 정치적 대립은 주로 대간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대간직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비교적 청렴한 성품의 소유자들인 한안인 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런데 예종대 후반기인 15년(1120)과 16년(1121)에 간쟁을 둘러싸고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상황은 크게 반전되고 만다.


예종 15년 11월 팔관회 행사의 제도가 과도한 것을 문제삼아 간관인 노원숭(盧元崇)과 진숙(陣叔)이 그 행사를 담당한 집사와 별가를 구금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이 행사를 주관한 한안인이 이들을 풀어줄 것을 간관에게 요청했으나 간관이 들어주지 않자, 국왕에게 자신들을 파직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예종은 노원숭과 진숙의 조치가 정당하였음에도 이들을 좌천시키고 한안인을 달래었다. 당시 노원숭과 진숙은 국왕의 뜻을 받들어 풍속의 사치를 규제하였던 것이다. 예종은 자신이 직접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처벌토록 명령한 조치에 대해 반발한 한안인에게 마음 상했을 터이지만, "대신의 의사를 어기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노원숭과 진숙을 좌천시켰던 것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다음해인 예종 16년 한안인세력의 일파인 한충(韓庶)이 이자겸세력인 최홍재가 개국사(開國寺) 공사에서 전횡을 일삼은 사실을 들어 탄핵하자, 예종이 한충에게 그만두기를 청한다. 그러나 한충이 계속 최홍재의 잘못을 지적하자, 한충을 좌천시킨 버린 사건이 발생한다.

예종이 간관인 한충과 임원준을 좌천시킨 이유는, "여진을 정벌하면서 부처의 도움을 얻으려 대장당을 개국사에 짓기"를 이미 허락하였는데도, 이들이 최홍재의 행위를 문제삼은 사실에 분노한 탓이었다. 한충은 한안인세력이었기 때문에 이자겸의 측근인 최홍재를 공격했다. 그런데 이때는 예종이 이미 이자겸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시기였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이미 허락한 공사를 문제삼았다는 두 가지 사실 때문에 간관 한충을 좌천시켜버린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사건은 예종으로 하여금 한안인세력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했다. 즉, 자신이 내린 명령과 조치에 대해 한안인세력이 간관직을 이용하여 반발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종의 의혹은 어린 세자의 지위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면 훨씬 커졌을 것으로 이해된다. 예종은 즉위할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었다. 그가 국왕이 되자 재상은 왕비를 맞아들일 것을 청하였으나, 국상 중이라 거절하였다.

재상이 결혼을 요청한 것은 후계 왕자의 생산을 위함이었을 것이다. 예종은 31세에 결혼하여 32세인 그 다음해에 왕자를 생산하였다. 예종의 후계자가 태어났으나, 아주 늦은 셈이다. 고려시대 모든 국왕의 평균수명은 43.93세였고, 태조부터 의종까지의 평균수명은 39.39세였다. 예종은 4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그런데 예종 10년 그의 나이 38세 되던 해에, 왕자 구는 7세의 나이로 왕태자로 책봉되었다.

결과적인 해석이기는 하지만, 당시 고려 조정 내에 예종 다음에는 어린 국왕이 즉위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예종의 입장에서는 세자가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받았을 때 직면하게 될 위기상황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부왕 숙종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헌종으로부터 무리한 방법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헌종대에는 외척 이자의의 반란모의까지 있었다.

그리고 예종대에도 7년의 승통 규의 역모사건과 부여후 수 유배사건, 12년의 회안백 기의 유배사건 등이 발생했다. 이러한 역모사건은 예종으로 하여금 세자의 지위를 보장하고 강화해 줄 수 있는 현실적 힘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을 것이다. 이에 비록 부패한 정치세력이지만 자신의 외척인 이자겸세력을 지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예종으로서 한안인세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었다. 이 또한 세자의 지위를 위태롭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에 예종은 한편으로는 한안인세력을 다독거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자겸의 지위상승을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한편 한안인세력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당한 이자겸세력은 그들 역시 간관직을 이용하여 한안인세력에 대해 반격하기도 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대다수의 관료는 이자겸의 세력권 하에 있었다. 즉, 이자겸의 가문과 혼인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신장코자 한 관료들이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이자겸의 가문을 더욱 번성하게 하였다.

때문에 이자겸은 자신의 가문을 내세워 현실의 정치력을 더욱 키워나갔다. 왜냐하면 당대에 자신의 실력으로 성장한 한안인세력과 비교할 때 가문이 번성한 점은 큰 장점이 될 수 있었다. 이에 한안인세력이 청렴한 성품과 '문행'을 강조한 점에 반하여, 이자겸세력은 가문의 번성을 내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고급관료들도 이자겸과 혼인함으로써 그들의 가문을 번성하게 할 수 있었다.

이에 당대 사회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타개해 나가야 할 고급관료들은 이자겸세력에 결탁하여 현실에 안주하고 만다. 그리고 고려사회는 '문행'이나 '유자의 풍모'가 아닌 '문벌'을 강조하는 사회분위기에 압도되고 만다. 요즈음 자주 쓰이는 <메인스트림>이 '문벌'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다.

예종대 말년 그가 택한 몇 가지의 정치적 선택은 비록 세자의 지위강화와 안전한 왕위계승을 위한 정치적 의도에 의거한 것이었지만, 결국 자신이 추구하고자 한 고려사회의 모순타파라는 정책과는 반대되는 현상으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자겸에 대한 예종의 정치적 지원이 커지면서 이자겸세력은 더욱 부패해져 갔고, 이는 고려사회의 모순을 더욱 키워나가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즉, 불안전한 왕위계승을 막음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중흥하고, 그 힘으로 고려사회의 모순을 혁신해 나가려 했던 예종의 의도는 성공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예종의 아들인 인종(仁宗)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이자겸의 반란과 묘청의 난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 아들 의종대(毅宗代)에는 고려사회 최대의 사건이 무신난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이후 고려사회는 무신집권 100년을 지나, 원나라의 간접 통치 100년을 거친 다음 멸망하고 만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아마도 예종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이후 고려의 역사는 그 모습을 달리 했을지도 모른다는 여운이 남는다.

이상에서 장황하게 살핀 900여 년 전 고려 제16대 국왕 예종의 개혁에 대한 욕망과 좌절은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당선자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에게 진정 개혁의 시대적 소임을 맡겨둔 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우리 국민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눈 내리는 겨울밤에 조용히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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