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긋한 그리움 '내사랑 누굴까'
향긋한 그리움 '내사랑 누굴까'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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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경화와 함께 읽는 책
두부 - 작가 박완서와 무의식의 어떤 힘

드라마 <내 사랑 누굴까?>가 끝났다. 작년에는 재미있는 이 주말 드라마를 보기위해서 일주일이 빨리 빨리 지나가는 것도 그다지 싫지 않았다.
극중의 할아버지의 잔소리가 많아서 좀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드라마 시간이 다 가오면 내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옆에 둔 것처럼 마음이 즐겁고 흔연스러워졌다. 그렇게 어느새 한 주 한 주, 한 달 한 달 , 한해가 지나갔다.

내 평생에 보았던 드라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드라마라면 아마도 <후회합니다>일 것이다. 그 연속극을 너무나 재미있게 보다가 어떻게 김수현이라는 이름은 알아냈고 그때부터 김수현의 연속극은 재미있다는 고정관념이 박혀버린 듯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쭉 김수현 드라마라면 놓치지 않으려고 각별히 애를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

70년대 초등학교 시절에는 미술 시간마다 주로 크레파스로 마을의 풍경들을 그렸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무가 있고 집이 있고 길이 있고 논만 있던 그림 속에 아이들은 제법 그럴 듯하게 텔레비젼 안테나를 그려넣을 줄 알았다. 그 당시 농촌에는 잘하면 이장댁과 동네 최고 부잣집이나 돼야 TV를 살 수 있었는데 TV가 있는 집은 당연히 마을의 영화관 노릇을 해야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아이들 때문에 주인이 무척 눈치을 주기도 했을 터인데 눈치밥인지 뭔지도 모르고 하여간 저녁밥만 먹으면 TV를 보러 달려가곤 했었다.

우리 외가집이 우리 동네에서 두 번 째로 텔레비을 샀다.
외가집에 TV가 있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한참 걸어서 뒷산을 지나야 했는데 해도 지기 전에 일찌감치 외가로 달려가서 텔레비젼을 켜는게 하루도 거를 수 없는 나의 일과였다.
어린애가 왜 그렇게도 연속극 <후회합니다>가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린 맘으로도 할머니한테 구박을 당하고 살던 엄마와 연속극의 "김혜자"의 처지가 비슷한게 좋았던 것 같다.

세상에서 우리 엄마만 그렇게 사는게 아니라는 점에서.... 그 김혜자 이야기를 엄마에게 더 재미나게 이야기 해주고 싶어서 연속극이 끝나자마자 캄캄한 산 옆을 더 숨차게 뛰어갔던 것 같고.... 연속극의 대사를 마음 속으로 흉내내보면서 사람들은 제각각 다 말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려서나 지금이나 재미있게 보던 김수현 드라마가 끝날 때마다 허전하기도 하고 다음번 김수현 드라마가 시작되는 언제일지 모르는 그 때가 기대가 되기도 하지만 이번에 <내 사랑 누굴까?> 끝나면서는 어쩌면 이담에는 작가가 늙어서 더 이상 드라마를 못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부>를 읽고나서도 그랬다. 책을 덮고 나서 언젠가 박완서 선생이 돌아가시면 서운해서 어쩌나, 오직 그 한가지 맘만 앞섰다.
책 여기저기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당신의 심경을 자주 피력하시는데 아차산 기슭에 새집 짓고 이사한 작가가 자기 태생지로 돌아가는 연어 같으시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추억하는 어린시절 이야기
'박완서'라면 귀가 설레는이 가슴을 누가 알까요


연어를 닮는 것은 작가만의 특별한 감수성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두부>는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추억하는 어린시절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차산에서의 일상사를 적은 한 노인의 일기이기도 하고, 한 국민이 새태를 풍자하는 흰소리이기도 하고, 평범한 사람의 수수한 문학론이기도 하다.
어느 글에서나 작가의 유년시절이 무의식처럼 녹아있다. 그 무의식의 힘으로 작가는 평생을 글을 써온게 아닐까?

칠순의 작가가 유년시절의 오감을 생생하게 재체험하는 글들을 읽으면서 외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금방 돌아가실 같아서 장례식 준비를 하고 할머니의 옷가지들을 하나씩 태우던 중에 할머니의 목숨은 새싹처럼 돋아나셨다. 너무 오랫동안 누어있다 보니 다리가 퇴화되어 걸을 수 없게 된 거 말고는 앉은걸음으로나 전보다 더 건강한 생활을 하시지만 그 어느 때보다 새 봄에 할머니를 뵈러 갈 때가 말할 수 없이 속상하다.

문턱 앞에 앉아서 우두커니 마당을 내다보시는 할머니에게 나무도 못 만져보고, 꽃냄새도 못 맡아보는데 새로 찾아오는 계절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할머니에게 아무 것도 못해드리는 나 자신이 한스럽기만 하다. 할머니에게 용돈을 드리는게 차라리 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다보니 언제부터인가 할머니 뵈러 가는 길이 조금씩 뜸해져가고 .... 어느날 나는 갑자기 할머니의 부음을 듣고 말겠지.....그리고 나는 처량하게 후회하겠지.

어린 시절 나를 업어서 키워주신 외할머니처럼 작가 박완서는 결혼하고 아이낳고 평범하게 사는데 이유 없이 괜히 울고 싶어질 때마다 그 울고 싶어지는 마음을 둥기둥기 업어주신 분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박완서의 소설을 읽어보기 전부터 마흔에 소설가로 데뷔한 그 특이한 이력이 좋았고 그때부터 가슴 속에 마흔을 푯말로 세우고 문학을 무작정 사모하였다. 마흔이 되는 이 나이까지 마음껏 사모라도 할 수가 있었다.
이 나이에도 '박완서'라면 귀가 설레고 가슴이 설레는 이 가슴을 누가 알까만은 그 설렘은 언제부터인가 내 무의식의 어떤 힘이기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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