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아름다운 다도해 호령하는 산-천등산(전남 고흥)
맑고 아름다운 다도해 호령하는 산-천등산(전남 고흥)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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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다 그치다 하기를 계속한다. 겨울비 내리는 날씨가 한하운의 시 <전라도길-소록도 가는 길에>처럼 처연하다. 나환자 요양소가 있는 소록도 가는 길목에서 자신도 나병환자였던 한하운의 시를 음미한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소록도는 녹동항에서 600m 정도 거리를 두고 떠 있는 작은 섬으로 흰 모래밭과 푸른 솔밭이 어우러지고 속까지 말갛게 비취는 바다의 정취가 감미롭다. 인공으로 조성한 공원에서는 사철 꽃이 피고 새소리 그윽하다. 이러한 소록도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는 수많은 나환자들의 눈물과 피땀이 서려 있다. 이청준은 <당신들의 천국>에서 소록도에 얽힌 나환자들의 애환을 소설로 꾸며놓았다.

거칠지만 아버지처럼 중후한 멋


벌교를 지나 아슬아슬하게 육지에 매달려 있는 고흥반도에 들어선다. 높지 않은 고만고만한 산과 넓지 않은 농경지가 소박하고 편안하다. 소록도와 녹동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 조그마한 포구가 있는 풍남항으로 방향을 잡는다. 풍남항과 쪽빛바다가 시선에 들어올 즈음 잿빛의 무뚝뚝한 산 하나가 잠자다 일어난 사자처럼 움칠한다. 오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천등산이다.

천등산 자락에 등을 기대고 앞으로는 넓지 않은 논과 고요한 바다가 펼쳐지는 송정마을은 한적하다. 마늘이 심어진 밭고랑의 겨울나는 모습이 소박하다. 마늘밭과 동네 가운데를 지난 길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산으로 인도한다. 봄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건만 봄을 기다리는 춘란의 자태는 의연하다.

가시나뭇재를 지나자 푸른 소나무 위로 딸각산의 잿빛바위들이 불규칙하게 불쑥불쑥 솟아 있다. 앞으로 보이는 딸각산의 바위들이 노동으로 거칠어진 어릴 적 아버지의 손 같다. 농사철에는 농사를 짓고, 겨울철에는 땔감을 구해오곤 했던 아버지의 손은 항상 거칠고 메말랐다. 하지만 무뚝뚝하고 거친 아버지의 손은 우리 식구를 먹여 살리는 손이자 우리 가족의 정신적인 버팀목 역할까지 하는 손이었다. 바로 딸각산의 바위들이 아버지의 거친 손인 셈이다. 거친 듯하면서도 거기에서 풍겨오는 멋이 아버지처럼 중후하다.

딸각산 아래 높이 7m, 넓이 3m쯤 되는 펑 터진 석문이 신비롭다. 석문에서는 바로 아래로 풍남항의 모습이 바라보이고 리아스식 해안선의 곡선미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바다 건너 거금도 적대봉(592m)은 구름에 살짝 가려 있다. 녹동과 소록도도 모습을 드러낸다. 점차 비가 그치면서 일행들의 걱정이 덜어진다. 얼굴에 부딪치는 바닷바람이 차갑다.

누군가 석문에서 치성을 드린 흔적이 남아있다. 바다나 평야 같은 수평적인 구조 위에 솟은 수직적인 바위나 산은 이것을 바라보는 인간에게 숭엄한 존재로 인식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이나 바위 그리고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정성스럽게 치성을 드린다.

딸각산(420m)에 올라선다. 돌을 밟고 올라오는데 딸각딸각 소리가 난다. 그래서 산 이름도 딸각산이다. 시원스러운 바다와 멋진 바위와 소박한 마을이 어울린 풍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남동쪽 암릉과 그 뒤의 곡선을 이룬 부드러운 산줄기 너머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북쪽에 위치한 정상의 포효하는 듯한 암릉은 마치 다도해를 호령하는 기세다. 거금도 역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가깝고, 소록도와 주변의 작은 섬들은 고막껍질을 엎어놓은 것 같다. 겨울바다는 겨울 산처럼 군더더기가 없어서 좋다.

일상적인 것이 소중한 것


딸각산과 천등산 사이 안부인 앙천잇재 부근의 너른 억새밭에서는 철지난 억새가 쓸쓸하게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정상부의 수십 미터에 이르는 벼랑과 암릉을 아래쪽의 너덜이 받치고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는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회색빛 바위를 등지고 푸른 바다를 앞마당 삼아 피어있을 붉은 철쭉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 설렌다. 정상 직전의 넓은 너럭바위에 오르니 금탑사가 북쪽 발 아래에 와 있다. 겨울의 금탑사는 천연기념물 제239호로 지정된 짙푸른 비자나무 숲에 둘러 쌓여 청순한 분위기다. 그리고 산 속 깊숙이 자리잡아 아늑하다. 비구니 사찰인 금탑사 극락보전 앞에 서면 멀리서 다가오는 팔영산의
모습이 매력적이다.

신선대로 불리는 이곳 너럭바위에서 보는 고흥반도와 팔영산, 마복산이 불룩불룩하고 다도해가 출렁인다. 신선이 노닌다는 신선대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다. 신선대에서 정상은 지척.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던 흔적이 있고, 그 위에 누군가 쌓았을 돌탑 하나가 서 있다. 정상부의 천애절벽을 이룬 암릉이 아찔하다.

천등산은 봉우리가 하늘에 닿는다고 해서 천등(天登)이라고 하기도 하고, 금탑사를 비롯한 주변 절의 스님들이 정상에 올라 천 개의 등불을 바쳤다고 하여 천등(天燈)이라는 명칭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

보기에도 아찔한 암릉을 지나 북쪽으로 가파른 능선을 내려선다.이곳에도 철쭉나무가 많아 화려하게 장식될 5월 초순을 기다리고 있다. 급경사를 지나자 부드럽고 완만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활엽수 많은 숲은 거친 암봉을 이룬 정상쪽과 대조를 이룬다. 가끔 뒤돌아보면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모습의 바위들이 인상적이다. 주변의 야트막한 산과 마을, 바다가 어울린 어촌 풍경은 마냥 정답다.

사동저수지로 하산하는 길을 버리고 능선을 따라 계속 전진한다. 곧바로 하산하는 코스가 조금 서운했기 때문이다. 많이 다닌 길은 아니지만 길도 확실하고 조용히 생각하며 걷기에 좋다. 동네 뒷산 같은 능선을 걷다보니 금방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일상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일 터. 마을 근처에서 유자나무를 바라보니 따끈한 유자차 한 잔이 생각난다.
산행코스
-. 제1코스 : 송정마을(1시간 10분) → 딸각산(40분) → 정상(50분) → 능선삼거리(50분) → 삼신마을 (총 소요시간 : 3시간 30분)
-. 제2코스 : 송정마을(1시간 10분) → 딸각산(40분) → 정상(30분) → 임도(30분) → 송정마을 (총 소요시간 : 2시간 50분)
*교통
-. 벌교와 고흥읍을 지나 녹동으로 가는 27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풍양항으로 가는 길이 가린다. 풍양항 조금 못 미쳐 송정마을이 있다.
-. 고흥에서 송정마을로 가는 군내버스가 하루 11회 운행된다.

(www.chosun.ac.kr/~gs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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