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통해서 세상을 만난다-2003 기고를 시작하며
산을 통해서 세상을 만난다-2003 기고를 시작하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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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같이 일어나 배낭을 꾸린다. 보온도시락에 밥을 담고,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주섬주섬 챙긴다. 겨울철이라 아이젠과 스패츠, 방한의류까지 챙겨 배낭을 완전히 꾸린 후 간단히 아침식사를 한다. 아내와 아이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일요일이라 마음놓고 늦잠을 자려는 게다. 거실에 있는 오디오에 클래식음악을 틀어놓고 아파트를 나선다. 혼자 산에 가는 미안함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음악을 통하여 표현하고픈 나의 작은 배려다. 어떻든 나의 일요일은 이렇게 시작된다.

벌써 이런 생활이 7∼8년은 되었을 성싶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보면 제일 먼저 산이 떠오른단다. 어느새 '장갑수=산'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 만큼 산이 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물론 내가 살아가는 전체 시간 중에서 산에 있는 시간이라야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산은 내게 '큰 바위 얼굴' 같은 존재다.
버스에 몸을 싣고서야 여유가 생긴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나는 왜 산을 찾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산처럼 살기 위해서'다. 그러나 나는 산처럼 살고 있지 못하다. 다만 산을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산을 닮으려면 산을 자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산에 간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온다. 무등산은 지난해나 올해나 변함이 없는데, 세월은 무정하게도 가고 또 간다. 어떤 사람은 세월의 속도를 열차에 비교한다. 20대는 비둘기호고, 30대는 통일호, 40대엔 무궁화호란다. 그러다가 새마을호, 고속전철로 점점 빨라진단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가속도가 붙는다.

허무하다. 마음은 아직도 20대 대학생 기분인데 흰머리가 하나 둘씩 나기 시작하고, 머리카락은 점점 빠져나간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도 아침에 거뜬히 일어나 출근을 하곤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젠 천만의 말씀이다. 조금 과하게 마셨다 싶으면 그 이튿날 일어나기가 고통스럽다. 체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고, 어떻게 살아야하나? 이런 물음을 찾으러 나는 산에 간다. 그런데 산을 오르고 또 올라도 산은 한번도 나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 열심히 시봉을 하면 큰 가르침이라도 줄 것으로 알았던 동자승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큰스님 같다.

지난 일년 동안 나는 '시민의 소리'에 '산에서 띄우는 편지'를 부쳤다. 솔직하게 말하면 산에서 띄우는 나의 부끄러운 편지다. 나는 주말에 산을 만나고 나면 꼭 부끄러운 편지를 쓰곤 했다. 편지는 독자에게 쓴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썼는지도 모른다. 아무 말씀을 해주지는 않지만 큰스님 앞에서는 겸허해지고, 자신을 추스를 수밖에 없는 동자승의 자세랄까? 바로 그런 마음으로 말이다.

미래는 과거의 지혜를 현재에 얼마나 잘 숙성시켜 내느냐에 달려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산 속에 묻혀 있는 조상의 지혜와 슬기를 가슴속에 깊이깊이 담아낼 일이다.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절집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 하나의 건축물에도 혼을 넣은 정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가르침. 거기서 현재를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다.

산이 가지고 있는 예술성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조각작품들이 수없이 진열되어 있고, 계절에 따라 다른 색상을 한 수채화들이 아름다움을 뽐낸다. 산길을 걸으면 고요한 음악이 감미롭게 들려온다.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가 소리의 축제를 벌인다. 그래서 산은 미술전시장이 되고, 야외공연장이 된다.

나의 산행은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순백의 눈꽃을 바라보며 감동하고 또 감동할 것이다. 무주 덕유산의 황량한 능선에서 몸이 날아갈 듯한 바람과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닥터지바고처럼 걸어볼 참이다.
그러고 나면 광양 백운산에서 고로쇠가 나온다. 잔인한 것은 인간이라더니 사람 몸에 좋다니까 나무줄기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 수액을 받아먹는다. 이유야 어떻든 고로쇠는 봄의 전령이다. 새들의 노랫소리가 상쾌해지고 산은 기지개를 켜면서 생명의 노래를 부른다. 나뭇가지에서는 새순이 돋고, 진달래와 철쭉이 색동저고리처럼 붉게 빛난다.

현재를 살아가는 지혜얻는다


사람들은 여수 영취산 진달래밭에서, 지리산 바래봉의 철쭉공원에서 한없이 행복해한다. 꽃이란 이런 것인가? 세상에서 아무리 지탄을 받는 사람도 꽃 앞에서는 순수해진다. 이런 꽃이 있었기에 세상은 이 만큼이라도 정화되었는지 모른다.

신록의 아름다움을 아는가? 누군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노래했는데, 연둣빛 신록이야말로 꽃보다 아름답다. 4월말에서 5월 초순에 이르는 활엽수의 새순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있을까 싶다.

뜨거운 여름날 지리산 계곡에 가보라. 그리고 녹음 짙은 숲길을 걸어 보라. 시원하고 상쾌하다는 단어의 뜻을 몸으로 알게 되리니. 물 속에 발을 담그지 않고 그냥 소리만 들어도 흐르는 땀이 절로 씻겨져 나간다. 산 능선에 올라서면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시원한 바람"이라 읊조렸던 동요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소신공양(燒身供養). 자기 몸을 불살라 수양을 한다는 소신공양은 얼마나 큰 아픔을 동반한가? 가을이 깊어 가면 바로 나무들이 소신공양을 한다. 나무들은 오색찬란한 색깔로 만산홍엽으로 만든 후 미련 없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자세에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세월은 가고 또 해가 바뀌게 된다. 이럴 때 고요한 암자를 찾을 일이다. 스님은 탁발을 갔는지 암자는 비어 있고, 법당에 매달린 풍경만이 암자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암자에서 풍경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소박해지지 않을 자 그 누가 있을까?

해마다 반복되는 자연현상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 좀더 성숙된 자세로 산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산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서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으려 한다. 그래서 '장갑수의 산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독자에게 다가서려고 한다.


올 한해 산이야기를 펼쳐놓을 장갑수씨는 조선대학교에 근무하고 있으며 산행관련 개인 홈페이지 www.chosun.ac.kr/~gsjang를 운영하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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