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혹은 당신의 선택
부끄러움, 혹은 당신의 선택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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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i honte(나는 부끄럽다).”지난 봄 프랑스에서 있었던 대선 1차 선거에서 극우 파시스트 정치인인 르펜이 이례적으로 많은 득표를 함으로써 2차 결선에 진출하게 되었을 때, 양심적인 시민들이 거리로 달려나가 반 르펜 시위를 하며 외쳤던 말이다.

그들이 부끄러웠던 까닭은 첫째, 르펜에게 대선의 결선 진출을 허용함으로써 그들의 삼색 국기가 상징하는 '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적 가치가 짓밟혀졌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 중 다수가 비록 르펜에게 투표하진 않았다고 하더라도 무관심 혹은 개인적 태만으로 인해 선거에 불참함으로써 그런 수치스러운 결과를 낳는 데 일조를 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인들이 겪었던 부끄러움은 현재 대선을 눈앞에 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직 선거를 하지 않아 결과를 논할 때가 아니지만, 그보다는 우선 개인의 투표권 행사 혹은 기권에 어떤 파급효과가 잠재해 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참정권은 헌법으로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이지만, 누군가는 투표를 거부할 양심적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으며 민주정신에 입각하여 그 주장도 또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프랑스인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투표를 하든 안 하든 어는 누구도 그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난 6월에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국회의원 및 지자체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보궐선거에서 유권자의 절대다수가 투표를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대리할 대표자가 선출되기는 했다. 그런데 그렇게 당선된 자들 중 일부의 자질에 대해 이따금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지만, 그 선거에 대해 부끄럽다고 말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프랑스인들의 반성적인 자기 고백은 우리에게 좀 더 심각한 문제에 관해 성찰해 보기를 요구한다. 이미 말했듯이 르펜이라는 특정 정치인과 그가 대표하는 국민전선의 약진 때문에 부끄럽다고 할 만큼, 프랑스인들에게는 각 정당간 정치노선의 차이가 인지되어 있다. 이번에 우리의 대선에서도 시민단체들이 결성한 대선연대와 언론이 각 정당에서 공약으로 제시한 정책을 비교,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선거문화의 지평을 연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그 정책들이 대개 구체성을 결여한 채 '空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빈번하고 일각에서는 정책 베끼기 시비가 일고 있는 형편이다.

다시 말해 정당간 정치노선의 차이를 드러낼 만한 정당정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어느 후보가 발상의 전환을 유도할 잠재성을 가장 많이 보여주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법 앞에 존재하는 만큼 그 법에 따라 만들고 운용하는 제도 앞에 존재한다. 그 제도의 하나인 선거에 참여하거나 혹은 기권하거나 마찬가지로 그 결과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프랑스인들처럼 뒤늦게 부끄러움을 고백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기본권을 행사할 것인가, 곧 당신은 선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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