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막섬 가는 길
까막섬 가는 길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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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의 '내가 사랑하는 세상'

까막섬을 떠올리면, 까마귀가 생각나고, 까마득하다는 말이 연상된다. 국보급의 상록수림이 우거진 까막섬. 까막섬은 땅 끝 마량에 있다. 가슴에 답답한 것들이 많아 숨겨 둔 바다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깝깝한 내 가슴속처럼 까맣다는 느낌이 든 이름을 가진 까막섬. 까막섬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나선 길이다. 별 생각 없이 한 시간 여를 내달으니 어느새 바다가 나온다. 구강포다.

지도를 펴고 탐진강과 구강포 부근을 바라보면, 영락없이 그곳은 여성의 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내가 태어난 곳이 탐진강 상류라는 점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 한반도는 풍성한 여인의 모습 같아서 경상도 쪽은 풍성한 엉덩이 같고, 전라도 쪽은 앞모습 같다. 음모처럼 들쭉날쭉한 서남해안. 강은 생식기처럼 내륙으로 뻗어있다.

더구나 탐진강과 구강포를 여성의 성기 같다고 한 내 생각을 받쳐주듯이, 알처럼 둥근 제주도의 옛 이름은 탐라국이었다. 또한 탐라국 사람들이 육지로 올 때는 대개 탐진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가장 빠른 길이 물길이었고, 탐진강의 하구는 탐라국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구강포를 여성의 질로 보고, 탐진강을 자궁으로 보았을 때, 영산남기맥 땅끝기맥으로 이어지는 석문산 덕룡산 주작산 두륜산 등은 오른쪽 소음순이 되고, 호남정맥과 탐진기맥이 되어 흐르는 용두산 제암산 사자산 삼비산 천관산 등은 왼쪽 소음순이 된다. 손대면 옴죽옴죽 발기할 듯이 좌우의 산들이 두드러져 있다.

김·미역 공장이 바다를 가로막아 답답하다

칠량면을 넘으니 대구면이 나온다. 앞산에는 커다란 청자 모양이 새겨져 있다. 알리는데는 제격이겠지만, 산 하나를 깎아서 만든 표시물들은 소름을 돋게 한다. 눈에 익은 산이다. 너머에는 외갓집이 있다. 산굽이를 돌아가니 네거리가 나온다. 왼쪽엔 청자박물관이고, 오른쪽은 미산리다.

네거리인데, 왼쪽의 길이 넓게 포장된 데 비해 오른쪽 길은 비좁은 마을길이다. 하지만 내게는 오른쪽 길이 더 넓고 환해 보인다. 외갓집이 그쪽이기 때문이다. 모두 도회로 나가버린 탓에 비어있을 외갓집. 어린 시절 내가 바다를 처음 만난 것은 이곳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 것이다. 바다를 본 나는 해수욕을 한답시고 밀물 든 바다에서 한 나절을 놀다가 뻘에 빠져 온 발이 찢기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이대흠

미산리로 들어선다. 붉은 양철 지붕을 한 외갓집이 보인다.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그리도 크게 보였던 대밭도 손바닥만하다. 김과 미역을 가공하는 공장이 바다를 가로막아 답답하다는 느낌이 든다. 공장을 지나 해안선을 따라 놓인 바닷길로 간다.

빈 배 하나 놓여있다. 썰물 무렵이라 뻘 위에 놓인 낡은 배는 그대로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인다. 슬프다. 폐선은 아니지만, 오래된 배는 내 나이를 생각하게 한다. 또 한 해가 지나면 마흔이 멀지 않다. 가슴을 막막하게 할 연애를 꿈꿀 나이는 이미 지났다. 허덕이다보니 어느새 중년이다.

갔던 길을 되돌아서 청자박물관 쪽으로 향한다. 박물관을 지나 한참 가면 정수사가 나온다. 물맛이 좋은 곳이다. 청자박물관을 바로 지나니, 줄기 많은 당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당산나무 곁에 있는 공알 바위가 재미있다. 흔히 당산나무는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 두 그루가 있게 마련이지만, 할머니 당산 한 그루만 있는 경우도 많다. 할머니 당산만 있는 경우에는 선돌이라고 일컫는 좆바위를 세우기 마련이다. 풍요를 기원한 탓이다.

초행의 사람이라면 청자박물관과 정수사를 꼭 들르라고 권하고 싶다. 곳곳에 놓인 고인돌들도 ‘이무롭’고 나이 많은 보살님도 ‘유재’ 같은 곳이다. 천태산 아래의 정수사. 천태종의 본산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은 조계종에 속한 절이다.

다시 차를 돌려 마량 쪽으로 향한다. 이 땅에서 가장 좋은 해안 도로 중 하나는 강진에서 마량을 거쳐, 장흥의 대덕 관산을 경유하여 보성의 회천까지 이르는 길이다. 보성에 이르러 시간이 남는다면 순천의 대대까지도 갈 수 있다. 하지만 그 길의 경우에는 몇 번이고 2번 국도를 지나쳐야 하기에 쉽지가 않다. 하지만 길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강진에서 시작하여 순천의 화포, 와온을 지나 여수에 이르는 길을 권하고 싶다.

군더더기 없는 항구는 겨울다운 풍경이다

어느새 수동리이다. 미산리에서 태어난 어머니의 택호는 수동댁이다. 택호라는 것이 굳이 그가 태어난 마을의 이름을 따르지는 않는다. 내가 태어났던 마을의 이름은 ‘만수’인데, 우리 마을에서 시집을 간 사람들이 ‘만수’라는 이름을 택호로 쓴 경우는 하나도 보지 못했다. 대개의 경우 우리 마을에서 시집을 간 사람들은 ‘마산댁’으로 불린다. ‘만수댁’이 발음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썰물 때의 포구는 악다구니가 없다. 여기저기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제법 많지만, 흥정 때문에 언성을 높이는 이도 없고, 술 취해서 비척거리는 사람도 없다. 저마다 제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들. 군더더기가 없는 듯한 항구의 풍경은 허튼 구석이 없다. 겨울다운 풍경이다. 마량이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부두가 까막섬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이더니, 그것이 아니다. 섬은 너른 뻘 너머 ‘저기’에 있다. 부두에 서서 까막섬을 바라본다. 유리구슬을 쌓아 둔 것처럼 보인다. 바람만 세게 불어도 금세 구슬들이 쏟아질 것 같다.

신발만 벗으면 금방일 것 같은 까막섬엔 공사가 한창이다. 더구나 상록수림 보호를 위해 민간인은 출입을 할 수가 없다. 보는 것만으로도 나무의 푸른 잎이 숨통을 틔게 해 준다. 허파에 바람이 든다. 발 밑에선 농게 떼가 와글와글한다. 풍경은 말이 없는데, 무수히 많은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림이 노래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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