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이런 대통령이 있었으면
우리에게 이런 대통령이 있었으면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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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대학에서 아태재단의 인수를 두고 이른바 '대통령학'에 대한 논의가 우리사회에서도 화두가 되고 이를 두고 여러 소리들이 쏟아지고 있다. 대통령학이란 결국 우리에게 어떤 대통령이 필요하냐는 시대정신의 발로로써 시대정신을 표상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듯 싶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거로부터 살펴보는 것이 오늘의 '대통령'이라는 지도력의 형식과 내용을 가늠지어도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현대사는 그야말로 눈물과 땀방울이 엮어진 오늘의 거울인 셈이다. 매국(사대)과 애국,좌충우돌,권위와 저항,독재와 반독재,분열과 단결 등이 얼룩진 우리의 얼굴이 바로 그 것이다. 그 와중에서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지도력의 맨 위에 '대통령'의 여러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우선 첫째로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채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친미사대주의로 흐른 이승만대통령의 지도력을 들 수 있다.자신의 집권욕을 위해서 무르익은 민족대단결의 절대적 사명을 간과하고 단정수립이라는 한쪽날개를 택함으로써 오늘의 남북분단이 고착화되고 아직도 우리사회에 청산되지 못한 식민의 잔재들,이른바 '우리 민족은 그래!'라는 민족성 비하론이 유산으로 남은 찌거기들이다.이를 사대주의에 근성을 둔 지도력이라 해도 무방할 듯 싶다.

둘째로 야만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군부파시즘의 지도력이다. 5.16군사쿠테타를 통해 대통령에 앉은 박정희대통령,서울의 봄을 짓밟고 청화대에 입성한 전두환대통령,그 뒤를 이은 노태우대통령 등이 이른바 권위주의적인 지도자들인 셈이다.민의에 기반을 두지 않고 군력과 권위로 지도력을 인수한 대통령은 질곡된 지도력의 2세들인 것이다. 그 통치시대의 절정에 요즘의 사오십대가 있었고,지금은 그들이 지도력 상층부의 일부를 이루고도 있다. 세간에 화두로 떠오른 386세대도 그 권위와 야만의 탄생세대인 것이다.

셋째로 야합에 의해 탄생된 교묘한 지도력을 들 수 있다.권위의 잔존세력과 일부 6-70년대 반독재세력간의 적절한 타협을 통한 야합지도력이다. 절차와 방법에서 민주성을 포장했으나 철저히 왜곡된,지역감정을 최대로 활용한 지도력이 탄생된 것이다. 이는 자의타의로 문민대통령이라 일컬어졌다.이른바 3김시대의 절정 속에서 탄생한 지도력인 것이다. 그 시절 한참 유행했던 화투놀이가 있었다.이는 물론 지도력을 빗댄 세간의 통찰함이 엿보인 시대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른바 '김영삼 고돌이'가 바로 그것이다. 화투에서 선을 잡은 이가 맘대로 '너는 광팔고 너는 표좋아도 죽고 골찌 너는 광팔지 말고 쳐!'하는 식의 화투놀이에 당시 대통령의 지도력이 그대로 나타난 셈이다. 굳이 관훈토론회에서 '전술핵'에 대한 질문에 동문서답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도력의 부실함이 여실히 입증된 우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넷째로 50년만의 정권교체로 많은 기대감을 준 '국민의 정부' 지도력을 들 수 있다.김영삼정권의 '경제국치'를 떠안고 온국민의 놀라운 단결과 힘으로 IMF를 타개하고, 각종의 민주적 조치와 절차를 통해 새로운 한국발전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지만 많은 한계를 보여준 '덜 준비된' 지도력을 꼽을 수 있다. 세계의 유수한지도자로 칭송되면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새경로를 열어젖힌 지도력이었지만 측근과 친인척의 부정비리에 철저한 경계를 펴지못한채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겠다던 그 지도력은 오늘 그 벼랑끝에 서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우리의 지도력의 과거는 2002년12월 19일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정말로 크다고 하겠다.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력의 실체는 무엇일까? 안팎으로 자신있게 내놓을 만한 지도력의 내용은 무엇일까?

여전히 지도력의 핵심적 관건은 민주적 리더쉽일 것이다.그것은 권위와 야만의 시대를 거쳐 야합의 지도력에서도 증명된 사안이다. 민의와 민주적 절차와 내용을 통한 리더쉽이 없이는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우리의 역사는 '역사적 항쟁'으로 보여주었다. 6.10항쟁이 그 대표적인 표증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지도력은 사대주의에 뿌리두지 않는 애국주의여야 한다는 것이다.나라와 민족의 이익을 맨 앞자리에 두고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외교정책의 근간을 펼치는 자존과 자긍심이 필요한 지도력이다.최근 주한미군에 의한 여중생압사사건을 두고 격앙된 반미감정이 이를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다. 부시미대통령의 변칙적인 사과표시도 결국은 정부가 앞장서 받아낸 것이 아니라 들끓는 민심이 얻어낸 반사이기 때문이다.애국적 지도력이라면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불평등한 SOFA로 남아있는 한미주둔군지휘협정은 반드시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지도력으로서 대통령은 부정부패와 비리의혹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군대를 보냈네 안보냈네'.'돈을 받았네 안받았네','돈을 떼먹었네 아니네' 등 각종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도력이라면 결국은 국민이 감당할 몫으로 그 책임이 귀결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객관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다음으로 국가의 대내외 정책과 국민의 의식주 안위를 위한 치정(治政)에 있어서 분명한 원칙과 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표를 얻기위한 카메레온식의 색깔바꿈은 이제 청산되어야 한다.용납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지도력에 대한 잘잘못에 책임을 질 줄 아는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솔직한 시인과 이의 '바로잡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점에 우리 모두 서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계의 동향과 정세에 밝은 미래안목이 있는 지도력이어야 한다. 이는 흔히 지도력의 '싱크탱크'로 표현되기도 한다.21세기의 발전경로를 보지 못한 낡은 지도력으로는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늘 뒷북만 치는 결과를 국민에게 떠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떻든 우리에게는 이러한 지도력이 겸비된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다.무엇보다도 그 바탕은 '국민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줄 줄 아는' 대통령을 뽑는 일이다.아니라면 그에 근접한 지도력을 선택해야 한다. 21세기를 맞이하여 처음으로 뽑는 대통령을 12월 19일에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두고 볼만한 일은 아니다. 세상은 꿈꾸는 자의 몫이므로!

최근 대통령후보의 자질론과 대통령학에 대한 논의가 활기를 띠고 있다. 이에 대한 독자여러분과 평론가들의 릴레이토론을 제안하며 이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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