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내부의 식민지와 지역 젊은이들의 자신감
한반도 내부의 식민지와 지역 젊은이들의 자신감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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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월드컵 기간동안 한국축구가 기대 이상의 좋은 성과를 올리며 계속 선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붉은 악마들을 중심으로 전 국민의 열띤 응원이 한 몫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쉽게 수긍할 것이다. 한국팀이 16강 진출에 이어 당초 목표였던 8강을 무사히 통과하고 이어 4강의 관문까지 뚫던 날, 경기장 관람석에 펼쳐진 'PRIDE OF ASIA'라는 카드 섹션은 한반도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근대사를 통틀어 서구열강의 게임상대가 되지 못했던 다수 아시아인들에게까지도 열광의 불길을 당긴 일종의 주술적 효력을 발휘했다. 이때까지 한국에 대한 모든 긍정적 정보를 차단해왔던 북조선에서도 TV중계할 만큼, 한국의 4강 진출은 아시아인들의 '자존심'을 일깨워준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문화가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한마음으로 모았던 월드컵의 뜨거운 포옹도 이제 풀리고 저마다 다시 생존경쟁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리고 월드컵 기간동안 경기가 열릴 때마다 한결같이 뉴스의 초점이 되었고 내외국인이 기꺼이 방문했던 도시들은 다시 게임전과 마찬가지로 서울과 지방으로, 또 지역별로 차별화된 공간상의 좌표들로 복귀했다. 그 사이에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었고, 한동안 붉은 셔츠 아래 동질적인 정체성을 표방했던 서포터스와 비서포터스 젊은이들은 그레이 수트로 갈아입었으며 그들의 시계는 취업 시즌을 가리키도록 재조정되었다.

지방출신자들에게 취업 시즌만큼 공간의 정치경제학이 살갗이 아리도록 절실하게 감지되는 시기도 없다. 대다수 대기업들이 서울경기에 포진해 있고, 지방에 소재한 중소기업들의 경우에는 그나마 일자리도 적을뿐더러 근무조건이나 장래성의 차원에서 대도시에 위치한 대기업과 비교하기 어렵다. 지방학교 졸업자가 서울소재의 대기업에 원서를 낼 경우, 그는 자신의 능력을 검증해 보이기도 전에 지방출신자로서 분류되기 일쑤다. 그와 대조적으로 서울소재 학교를 다닌 자는 '서울(대)출신'으로 선별된다. 근대 식민지에서와 유사하게, 지역에 따른 종의 계열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차별화의 이유를 대기업체의 리크루팅 담당자들에게 물어보면, 흔히 지방출신자들은 "자신감이 부족하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감의 결여는 결과적으로 창의력 개발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진취적인 업무수행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기 쉬우므로, 무한경쟁이 벌어지는 시장에서 이윤추구를 극대화하려는 기업경영자들의 눈에 치명적인 결격사유로 보일 것은 명백하다.

지방출신자들의 자신감 결여는 형질적 원인보다는 분명 사회적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감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이기보다는 현재 사회의 가치체계에 부합하는 지표들을 획득한 정도에 따라 갖게 되는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자원과 기회가 집중된 서울에 사는 개인이 그렇지 못한 조건에 있는 지방출신자보다 당연히 자기능력을 계발할 여지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모든 면에서 지방과 서울간의 격차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지방출신자들은 계속 똑같은 불이익을 감수할 것이라고 미리 좌절하고만 있을 것인가?

부조리한 상황이 지속되는 것은 대개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기 보다 내부의 묵인과 동조 때문이다. 근대한국의 기형적 역사가 지역간 불균형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중앙 정부의 정책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인재육성을 담당하고 있는 제도권의 교육은 개각 때마다 각종 처방이 다르게 내려지지만 여전히 대입시를 목표로 획일적이고 서열화되어 있다. 이런 교육환경에서는 전적으로 자신감이 충만한 지역인재를 배출하기 어렵다.

세계화의 시대에 인재육성은 지방의 현재 발전과 미래의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이다. 다행히 점차 지방자치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의식있는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생활세계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시민사회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인재육성을 전문교육기관에만 내맡길 것이 아니라, 지자체와 시민단체들과 역내 기업체들이 적극적으로 연계 지원하는 체제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각 기관마다 제도권 교육처럼 미리 설정된 목표나 결과를 강요하지 않고 젊은이들이 주체적인 판단으로 목표와 방법 모두 실험할 수 있는 장과 기회를 제공하는 데 적극 투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감을 키우는 데에는 주체적으로 어떤 일을 설계하고 수행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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