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에서 만난 두 대가
오아시스에서 만난 두 대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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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아시스>를 보고 마르케스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떠올리다

하지만 이들 작품들은 이러한 비난에 대처할 만하다. 환상을 보여주면서도 환상에 매몰되지일전에 백년의 고독'을 소개하면서, 영화 <오아시스>와 많이 닮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지면 관계상 이야기를 길게 하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 이렇게 다시 두서없이 얘기를 꺼낸다.

그런데, 사실 나는 <오아시스>를 보면서 두 사람의 작가를 떠올렸었다. 그 중에 하나가 '백년의 고독'의 마르케스였고, 다른 하나는 도스토예프스키였다. 처음에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독이 이 두 작가를 탐독한 후에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만들지 않았나 하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먼저 '백년의 고독' 얘기부터 해보자.

내가 <오아시스>를 보면서 '백년의 고독'을 떠올린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영화에서 때때로 보여지는 환상적인 장면들이 자연스레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인구에 회자되는 '백년의 고독'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모순형용적인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리얼리스트'인 이창동 감독이 '환상'을 영화에 집어넣었다는 사실과 일맥이 상통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모순형용

소설 '백년의 고독'의 최대의 묘미는 내전과 식민지 침략으로 점철된 라틴 아메리카의 슬픈 현대사가 환상과 마술에 의해 아름답게 시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오아시스>도 마찬가지. 그러나 이러한 전달방식은 한 가지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곧 피해자 스스로가 자신의 아픈 경험을 미화함으로써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름 아닌 격이라는 비난을.

하지만 이들 작품들은 이러한 비난에 대처할 만하다. 환상을 보여주면서도 환상에 매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촌스런 달력이 붙어있는 좁은 방안에서 어색한 인도 춤을 추는 장면에서 보여지듯, <오아시스>의 환상은 완벽한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환상이다. 어찌보면, 환상적인 장면들은 현실의 어두움, 잔혹함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포석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 현실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지점에 <오아시스>의 두 번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있다. <오아시스>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환상이 아니라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인물들의 시선이다. 주인공들을 그들만의 '환상적 사랑'에 빠지게 내버려두지 않고, 주변의 시선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이 영화는 '성별이 뒤바뀐 속편 미녀와 야수'에서 벗어나 극단적 리얼리즘을 구현한다. 그래서 정말로 압권인 연기는 뇌성마비 장애인 역을 한 문소리의 연기가 아니라 조연들의 연기이다.

오아시스의 현실적 환상

그런데, 그들은 악인들인가? 우리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이렇게 선/악의 모호한 경계선상에 서있는 인물들을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자주 목격한 바 있다. 결코 악인이 아닌 그들이 운명처럼 비극적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는 묘미란! (특히, '악령', '죄와 벌'을 읽어보시라!)

또 한가지,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그 독함! 이는 인물의 치졸함과 비루함을 끝 간 데까지 보여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독함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정말로 보고 싶지 않은 극단까지 치달음으로써 사람의 심리를 긁어 놓는 수법에 독자는, 혹은 관객은 경악한다. "설마 거기까지 보여줄 줄은…!" 이러한 독함은 진정성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래서 불편함과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우리는 그들의 작품에 빠져들게 되고야 만다.

※ 그 독한 면모가 유감 없이 발휘된 장면이 영화 말미에서 종두와 공주가 정사를 벌이다 발각되는 장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쌓여온 긴장감이 이 장면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초반부에 종두가 공주를 겁탈하려 하는 장면이 제시되는데, 이 사건은 관객의 뇌리에 계속 남아 있게 되어 관객은 과연 언제쯤, 어떻게 종두와 공주가 육체적으로 결합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게 된다.

그가 저지른 범죄 중에 강간미수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관객에게 알게 모르게 긴장감을 부여하는 요소다. 몇 번의 예행연습 후에 이들은 마침내 정사를 벌인다. 이 결합을 통해 두 부적응자는 서로에게 있어서나마 완벽한 인간으로 거듭난다. 그 동안 쌓여왔던 긴장이 풀리는 순간이다.

그런데 완전히 풀리지는 않는다. 이유 있는 거부감이 마음 한 켠을 짓누른다(이 거부감의 원천은 공주 역을 맡은 문소리의 완벽한 연기 탓이고,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뿌리깊은 편견 탓이리라.) 게다가 이들이 완벽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우연히도 공주의 오빠 내외가 이들이 정사를 나눌 때 들이닥치게 되고, 이들은 사회적 편견 앞에서 다시 '반편이'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되고 만다.

진실은 편견과 이해관계에 의해 조작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두 사람은 말을 할 수 없거나―그 답답함과 절망을 표현하는 공주의 몸부림 역시 인상적인데―말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 둘의 정사를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 '경악 그 자체'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경악 속에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자의식이 그대로 담겨져 나오기 때문이다. "불, 불이야!"라고 숨막히듯 소리칠 때 우리는 뭔가 시원함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것은 사실 우리 스스로 외치고 싶었던 외침이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 마음 한 구석에 쌓여왔던 긴장, 두 비정상인의 나름대로는 완벽한 결합도 풀어주지 못했던 그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정말, 정말 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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