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들녁을 어쩌랴!
저 들녁을 어쩌랴!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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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4년만에 다시 맞섰다. 70-80세가 다 된 촌로들이 "내 평생 처음이야" 하던 물난리를 농사 시작하고 8년만에 벌써 두번째다.
우리가 재수가 억세게 나쁜 것인지 아니면 이미 자연이 인간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인지 선뜩 어느 장담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지독한 수해를 떠올리면 정말 자연과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이놈의 농사를 딱 때려 치우고만 싶다.

바람과 비가 잦아들자 한껏 웅크렸던 온몸의 사지를 펴며, 슬그머니 문을 비끼고 나선 우리앞에 엿가락처럼 휘어버린 축사지붕, 30여 마지기에 달하는 논의 벼들은 전멸하듯이 누워 있다. 그 들녁으로 휘청휘청 비아냥대며 지나가는 바람의 뒷모습에 눈물만 왈칵 솟구칠뿐이다.

누워버린 벼 앞에 눈물만 왈칵

쌀값도 별볼일 없을 것 같은데 고생하지 말고 그냥 두었다 수확하라는 도시 사는 형제들 말에 그냥 주저앉을 수 없는게 바로 농민들인가 보다. 그날로 품앗이를 하려해도, 돈을 주고 일꾼들을 얻어보려 해도 여느 해처럼 수월치 않다.

4년전 이보다 더 쓰러짐 피해가 컸을때도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끝나면, 굳이 묶어 세워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내 하루 해줌세." 하고 맨발을 논으로 내밀었었다. 하지만 어째 올해는 "품값은 많이 쳐줄테니 사람좀 구해보자!" 해도 어느 누구 "해줌세." 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귓전에 남는 소리는 '벼묶는 일이 일중에 제일 힘든일 아님가? 이제 늙고 병들어 기운도 없제만 쌀값도 어쩔지 모르는데 .....' 하는 체념섞인 말들이 흩어진다.

우리집도 우여곡절 끝에 꼬박 일주일걸려 쓰러진 벼들을 묶어 세웠다. 옆집 할머니는 일주일 내내 혼자 묶었다. 서울사는 자식들에게 연락을 취해봐야 "그 시간에 돈 벌어서 사먹지 뭐 하러 묶느냐.'며 돈을 부친다고 했단다(자영업이라 시간을 내줄수도 있으련만). 하여튼 우리도 품값만 100만원이 넘게 들었다. 올 가을에 그에 버금가는 수확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셈하지 않는 농군의 마음

정말 무엇 때문에 그깟 벼들을 죽기살기로 묶으려 했는지 나 자신도 모를일이다. 벼를 묶어 세울 때 내가 '품값 얼마니까 여기서 수익을 얼마나 올려야지!' 라고 단 한번이라도 떠올려 봤을까?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분명 그렇게 했어야 한다고, 그래서 이득이 있는 쪽으로 행동을 했어야 한다고.
하지만 나도 말하고 싶다. 벼를 묶어 세우는 동안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다고. '며칠안에 저 쓰러진 이삭에서 바로 움이 틀것이기에 지금 당장 묶어세워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런 떠올림도 없었노라고! 이런 농군들의 마음이 있기에 여즉 당신들이 그나마 식량 걱정 않고 살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당신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정말 나는 말해주고 싶다.

아프리카의 식량부족국가에 유전자 변형식품이라도 원조를 줄까했더니 굶주림에 허덕이는 그들은 'No'라고 말했다 한다. 적어도 배고픔의 서러움 때문에 무조건 무엇이든 주면 먹게되는 날이 그 누구에게 없으리라고 장담할까? 철퍼덕 논바닥에 처박혀 허옇게 움을 틔우는 저 벼들은 한치앞을 내다 보지 못하는 오만한 인간들에게 알리는 첫 경고장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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