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 찾아온 가을날 풍경
벗이 찾아온 가을날 풍경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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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선의 산골마을 이야기

추석을 지내러 인천에 갔다오느라 사나흘 집을 비웠더니 산골 한치는 그새 가을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농약 냄새가 가신 누렇게 채색한 논배미며 낙엽 천지인 마당이며 홍시를 매달고 있는 감나무며 저 높고 푸른 하늘이며... 마치 하루하루 크는 아이도 오랜만에 보아야 성장을 느낄 수 있듯이 사나흘임에도 계절의 경계가 있기라도 하듯 여름에서 가을로 훌쩍 건너온 느낌이라니.

어제 밤, 하늘이와 잠자러 누우니 차가워진 밤공기가 모기장이 처져 듬성듬성한 방문으로 물밀듯 파고들었습니다. 창호지를 발라야할 모양입니다. 장흥에 창호지를 사러 갔다오니 재 너머 영암 금정에 사는 목사 친구가 왔다가며 얼굴이나 보러 들렀다는 메모를 남겼습니다.

오랜만이라 전화를 합니다. 이런저런 얘기 가운데 뜬금없이 오리고기 얘기를 합니다. 집에서 키운 오리가 있어 가져갈테니 잡아먹자 합니다. 좋지요, 대답합니다.(사실 애비의 정성이 없어 날마다 부실하게 먹고사는 하늘이가 좋아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지요.)

이제부터 조금은 엽기적이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오리의 죽음과 이 친구가 맛있는 고기가 되어 우리의 입 속으로 들어온 과정을 조금 길게 얘기해볼까 합니다.(독자 중에 과격한(?) 채식주의자가 없길 바라며)

차에 실려온 오리 두 마리는 벌써 반은 실신 상태였습니다. 둘이 즐겁게 잘 놀고 있다가 갑자기 결박당해 낯선 곳으로 실려왔으니, 그것도 온 생명에게 사랑을 말씀하시는 목사님의 손에 잡혀왔으니 정신이 없을게 당연합니다. 우리 목사님은 끈으로 오리의 목을 묶어 나무에 매달고 나는 마당 한켠에 솥단지를 걸어 물을 붓고 불을 땝니다. 오리가 거의 죽었나 축 늘어지니 우리는 본격적으로 오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나는 오리의 주둥이를 꽉 잡고 우리 목사님은 손수 가져온 날렵한 사시미칼로 오리의 목을 자릅니다. 피가 울컥울컥 쏟아집니다. (어렸을 적 집에서 키우던 오리를 잡으면 가까이 사시던 먼 친척인 나이 든 형수님은 꼭 소주에 피를 받아 마셨습니다. 약이 된다 했습니다.)

어지간히 피가 쏟아지자 우리는 끓는 물에 오리를 골고루 담갔다 건졌습니다. 털을 쉽게 뽑기 위해서지요. 털이 정말 잘 뽑혔습니다. 오리는 물에서 노니 방수를 위해 속털이 아주 촘촘합니다. 그런데 한치 물이 좋았나 털이 아주 수월하게 뽑혀서 목사 친구가 가져온 털을 태우는 가스불은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나는 텃밭에 나가 벌써 벌레가 먹기 시작한 가을배추를 솎아 뜯어오고 친구는 오리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구워먹기 좋게 자릅니다. 그 사이 전화가 와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늦은 하늘이를 차로 데려오니 친구는 지글지글 오리고기를 굽고 있습니다. 하늘이는 배가 고팠는지 맛있게 잘 먹습니다. 하늘이는 먹다가 우리집 개 보고에게 자주 갔다 옵니다. 보고도 오랜만에 포식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요 이쁜 오리로 해서 즐거운 저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살려면 돼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닭이나 오리 정도는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드물지만 예전에는 추석같은 명절이면 마을집에서 키운 돼지를 잡아 집집마다 나누어 먹었지요. 물론 마을에는 돼지를 잘 잡는 사람이 어디나 있었지요. 말하자면 돼지가 죽어가며 지르는 그 끔찍한 비명조차도 마을공동체에 꼭 있어야할 소리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요.
어찌되었든 너무나 높고 푸르러서 차라리 쓸쓸해진 가을날, 오리와 함께 찾아온 벗이 있어 너무나 기분 좋은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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