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직장과 집안일
새 직장과 집안일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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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에서 25살 아줌마가 보내는 엽서

대학을 졸업했고 아직 25살, 무엇이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결혼한 여자'인 내가 직장을 구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내보았지만 결혼을 했다는 사실은 번번히 걸림돌이었다. 능력이 중요하지 결혼의 유무가 중요한 것은 아닌데... 결국 한달 여의 노력 끝에 휴양림에서 일하게 되었다.

휴가철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사라진 사평 휴양림은 '조용한 숲'으로 변해 그 멋을 더한다. 길을 걷다가 툭툭 하는 소리에 놀라 바라보면 속이 꽉 찬 밤송이들이 떨어지고 또 그 밤들을 줍는 다람쥐들의 바쁜 몸놀림도 몹시 귀엽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 휴양림에 직장을 구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바로 '가사 노동' 문제이다.

예전에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내가 집안일의 대부분을 맡아 했다.그러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결혼 초기에 세웠던 '집안일 공동 분담'의 원칙이 무시되고 남편도 거기에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많은 사람이 집안일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애써 해왔다.

그런데 주말 휴무에다 기본 근무 시간이 9시간인 '휴양림'에서 일하다 보니 매일 집안 일을 할 짬을 내기 힘들었다. 그러자 설거지는 쌓여 개수대는 지저분하고 방안 구석에는 머리카락도 쌓여갔다. 할 수 없이 나는 쉬는 날의 대부분을 집안일로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남편은 시간이 남으면 잠을 자거나 오락을 하는 것이다. 아직 익숙치 않은 일에 피곤한 몸으로 집에 들어오면 엉망인 집안에서 남편은 컴퓨터 오락을 하고 있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몇 번 참다가 남편에게 문제를 이야기했다.

남편은 "대충 살면 되지, 뭐 꼭 깨끗이 해야 되느냐"며 얼버무렸다. 그래서 나도 몇 일 더 버텨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도 느끼면 하겠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 착각이었다. 남편은 내가 걸레를 들지 않는 한 청소하려고 하지 않았고, 설거지를 하더라도 꼭 내가 다시 한번 뒷정리를 해야 했다. 남편은 자취생활을 10년이나 했고 4형제만 있는 집안의 아들이라 그간 집안 일도 곧잘 해 왔는데, 결혼한 지금은 자취생활 한 번 한적 없는 나보다

집안일에 있어서 섬세하지 못했다.
그런 차이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나나 남편이나 '집안일은 여자의 몫'이라는 사회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남자인 남편에게 '집안일'이란 자연스런 일상이 아닌 뭔가 '특별한 일'이었던 것. 또 나는 집안일은 온가족이 함께 해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지만, 은연중에 '여자'라는 이유로 더 많은 책임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깨달으면서 무작정 남편에게 요구하고 화낸다고 해서 될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0년이 넘게 젖어 있던 자기 생활과 생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닐테니까.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체념하지도 않을 것이다. 꾸준히 이야기하며 이 문제를 함께 풀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몫을 다 해가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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