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성과 상대성-김용택시인에 대한 김병인님의 글을 읽고
절대성과 상대성-김용택시인에 대한 김병인님의 글을 읽고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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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논쟁중>

지난 8월26일자 <문화난장>에 실린 김병인님의 문화칼론 '조선일보와 섬진강시인, 그 오묘한 사랑의 비밀을 읽고...'에 대한 비판과 재비판글들이 꾸준히 오르고 있습니다.
지난 2일자 <시민의소리>에 좋은 책방 김민해대표의 '조선일보와 섬진강 시인...'에 대한 반론글이 게재되고 이후 <시민의 소리>게시판에 윤정현님이 비슷한 입장을 밝히자 역시 게시판과 기사댓글을 통해 반박글들이 잇따르는 등 논란이 계속되는 실정입니다.
이에따라 <시민의 소리>는 민족문학 작가회의 회원인 윤정현님이 6일, 김병인님의 글에 대해 정식으로 비판을 제기해 온 글을 싣습니다. 건전한 비판과 토론이 자리매김하도록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바랍니다.



지난 8월26일자 시민의소리 문화난장에는 <조선일보와 '섬진강 시인', 그 오묘한 사랑의 비밀>이라는 제하의 김병인님의 글이 실려 있었다.
요지는 조선일보는 여러가지 면에서 문제가 많다. 김용택 시인이 인문학적 고뇌를 싫어하는 서정시를 쓰고, 전라도 사람인데다가 조선일보를 비호하는 발언을 해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쓰인 논리적 틀과 언어표현이 심히 객관성을 상실했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필자는 자유게시판을 통해 상당히 격한 발언을 했고, 이에 대해 김병인님께서도 답글 형식으로 의견을 피력하셨다. 조선일보의 사실왜곡과 진보진영의 일부가 조선일보에 대해 유보적인 판단의 자율성을 염두해둔다면 그런 비판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조선일보의 객관성 상실, 필자의 감정적 대응 등을 언급했다.

안티조선과 감정 자제에 동의한다. 하지만 김병인님은 필자 주장의 핵심인 김시인 비판에 대한 주관성을 수긍하지 않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반론한다.

첫째, 김시인의 섬진강편에는 인간적 고뇌가 담겨있지 않다는 단정의 문제다. 시나 서정시에 관한 인식의 편차는 인정하더라도 언어, 특히 서정시에서의 언어구사의 중의성, 복합성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시집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긴 곤란하지만 김시인이 노래하는 섬진강편은 자연의 노래임과 동시에 인간의 노래이다.

'자연의 노래'라는 단정은 오독


일례로 ‘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란 시제목을 보자. 이것을 누가 ‘마당은 비뚤어졌지만, 장구는 바로 치자’라는 직설어법으로 받아들이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런 뜻도 있지만, 오도된 시대적 상황에도 처세는 바로 하자는 데 독자들이 더 큰 방점을 두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따라서 섬진강편에 대한 김병인님의 인문학적 고뇌를 뺀 자연의 노래라는 단정에는 김시인의 시에 대한 오독의 흔적과 논리적 비약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둘째, 김시인 비판에 대한 김병인님의 언어표현의 부적절성이다. 신문에 나는 연구자의 글은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보여지는데, 거기에 사용되는 김병인님의 표현은 너무 지나치다. 필자에게는 ‘오묘한 사랑’, ‘산골 초등학교 교사’, ‘김시인의 사회 인식에 대한 무지에 가까운 능청스러움’, ‘영혼이 살아 숨쉬지 않는 순수와 서정’ 등의 언사는 객관성을 상실한 주관이 강한 자기주장의 편린으로 보이고, 이러한 것은 결과적으로 김시인의 필생에 걸친 여러 역작들의 성과를 크게(명예훼손에 가까울 정도로) 반감시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어디서건 자기주장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논리적 규명을 업으로 하는 연구자가 논리보다는 ‘추론’과 감정적 언사를 많이 동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주장의 목적은 타인의 동의를 목적으로 하는데, 가치판단에 있어 절대성이 약화되고 상대성이 널리 인정되고 있는 마당에, 필자의 견해로 그러한 편협한 주장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겠느냐는 것이다.

셋째, 전선을 어디에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조선일보의 사실왜곡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논리적 설득과 동의의 방법이 가장 효율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설득과 동의를 위한 관용


이 설득과 동의의 과정에는 텍스트의 접근에 대한 객관성과 함께 관용과 포용의 자세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문학적 고뇌를 중요하게 간주하는 시인더러 인문학적 고뇌를 배제한다고 하고, 조선일보와 오묘한 사랑의 비밀을 간직한다고 하면 당사자인 김시인은 물론 그의 정서적 동반자인 대다수 독자들의 동의를 끌어내겠느냐는 것이다.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사람들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이런 방식은 논리적인 면에서는 의미를 가질지 모르나 현실의 측면에서는 안티조선운동의 효과적인 운동방식이 못될 것이라는 견해다.

한편, 김시인이 어느 행사장에서 “조선일보가 뭐 그리 나쁜 신문이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면, 큰 유감이다. 하지만 이러한 텍스트 자체도 상황과 내용을 거두절미 하고 발췌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른 오해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진리나 텍스트의 절대성 보다는 상대성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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