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69회]-임진왜란 7년 전쟁의 여파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69회]-임진왜란 7년 전쟁의 여파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2.14 16: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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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7년 전쟁은 동아시아의 지축을 뒤흔들었다.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추종세력을 물리치고 패권을 장악했다.
이어서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은 멸문지화 당했다. 중국에선 1616년에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가 1619년에 만주의 여진을 통일했다.

아리타에 있는 '도조 이삼평비'

전쟁터가 된 조선은 인적. 물적 피해가 업청 컸다. 왜군들은 수많은 조선인을 일본으로 끌고가 노예처럼 부리고 나가사키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아먹기도 하였다. 왜군은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끌고 갔다.
남원성에서 순절한 이복남 장군의 셋째 아들과 장성 기씨 부인의 두 아들들이 그들이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 포로는 최소한 1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1597년 9월에 잡혀갔다가 1599년 7월에 조선으로 돌아온 정희득은 일본에 잡혀간 포로가 남자가 3~4만 명은 되겠고, 늙고 약한 여자는 그 수가 갑절이나 될 것이라고 상소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전쟁 후에 조선으로 돌아온 포로는 6천3백 명 정도였다. 구우일모(九牛一毛)였다.

아울러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듯이 왜군은 많은 도공을 납치하였다. 당시에 일본에서는 다도가 유행하여 조선에서는 일상생활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릇들이 일본에서는 귀중한 보물로 여겨졌다.

번주들은 납치한 도공들을 특별히 대우하면서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그 중 일본 사가현 아리타로 끌려간 이삼평, 가고시마로 끌려간 심당길 등은 일본 도자기 산업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
특히 아리타 도자기의 원조 이삼평은 도자기 신이 되어 아리타에는 <도조신사>가 세워져 있다.

물적 피해도 엄청컸다. 방화와 약탈이 전라도 전역에서 일어났는데, 왜군은 마을을 불 지르고 사찰과 정자 등을 불태웠다. 장성의 필암서원과 기영정, 광주향교와 담양 소쇄원, 순천의 송광사, 선암사 등이 불탔다.
선암사의 경우는 철불 1기, 보탑 2기, 부도 3기와 문수전, 뒷간, 조계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불타 흔적마저 없어졌다.

각 관아에 비치된 각종 토지대장, 노비대장, 호적대장 등 공문서와 개인 소장 서적도 불탔다.

아울러 왜군은 많은 것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초기부터 전투부대와는 별도로 6개 특수부대(도서부·공예부· 포로부·금속부·보물부·가축부)를 편성하였다.
6개 특수부대중 도서부는 전적류(典籍類)의 수집을 맡았고, 공예부는 도자기 등을 포함한 각종 공예품및 목공, 직공(織工), 도공 등 공장(工匠)의 납치를, 포로부는 한의사와 젊은 남녀의 납치를, 금속부는 조선의 병기 및 금속예술품, 금속활자 등의 탈취를 맡았다.
또 보물부는 금은보화와 진귀품의 노획을 맡았고, 가축부는 가축을 포획했다.

예를 들면 고봉 기대승(1527-1572)이 1557년에 발간한 『주자문록』도 가져갔는데 이 문집은 지금 일본 내각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노송당 송희경의 『일본행록』도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일본에 끌려간 정경득이 필사하여 1599년에 가지고 돌아왔다.

전쟁터인 조선의 피해는 처참했다. 기근·전염병·포로 등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인구는 1591년의 1,300만 명이 1598년에는 1,085만 명으로 215만 명이 감소하였고 토지 결수도 임진왜란 이전에 1,515,591결이었던 것이 1604년에는 342,634결로 80%가 줄었다.

한마디로 향촌사회가 무너지고 촌락은 황폐화되었다. 심지어 진원현의 경우 독자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1600년에 진원현은 자립이 불가능하게 되자 간판을 내리고 장성현과 합병하였다. 전국에서 유일했다.

한편 조선은 명나라를 재조지은(再造之恩, 거의 망하게 된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으로 섬겼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친명(親明)으로 일관했다. 이러자 1627년에 정묘호란, 1636년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淸) 태종에게 신하의 예를 갖췄고 두 왕자와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중국으로 끌려갔다.

1644년에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했다.
그러나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고 유명조선(有明朝鮮)을 외치며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외면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312년 된 1910년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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