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소리>새내기의 '나의 지리산 종주기'
<시민의 소리>새내기의 '나의 지리산 종주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8.0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누구나 한번쯤 산을 꿈꾼다. 거대하고 거친 산행의 고통이 산의 정상에서 인내와 성취의 기쁨으로 되돌아오는 경험. 그 경험은 산으로 난 많은 길에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자욱이 이어지게 한다.

시민의 소리 수습기자로 첫 발을 내딛은지 2주째, 풋내기 기자의 설레임에 들떠 있는 나에게 지리산 종주라는 과제를 내 건 선배들의 속내가 그러했을까. 기쁘고 설레는 일보다 힘들고 좌절할 일이 많을 지도 모를 기자 생활, 조금 더 단단하고 강해질 내 모습을 꿈꾸며 아직은 서먹하기만 한 선배들 틈에 끼여 지리산 능선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 길이와 넓이도 모른 풋네기의 첫 등정



종주 코스는 화엄사에서 출발해 노고단을 거쳐 천왕봉에 닿는 길이었다. 지리산의 거대함과 웅장함을 머리 속에서만 상상해 온 나는 그 길의 넒이와 길이를 가늠하지 못한 채 소풍 나온 아이처럼 가볍게 화엄사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가 땅에 닿을 것 같다 해서 이름 붙여진 험한 '코재'를 넘고, 지그재그 비탈로 숨이 탁 막히는 오르막을 지나도 멀리서만 반짝이고 있는 노고단 중계탑.

그 때 문득 걸어도 걸어도 닿지 않는 저 곳을 선배들과 '함께'가 아니라면 과연 오를 수 있을까 싶다. 여태 낯설기만 했던 선배들의 손목이 따뜻하고 친근하게 느껴질 무렵 드디어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노고단 하늘 아래 올랐다. 길가에 선배들과 아무렇게나 누워 정복의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의 기분에 취하게 된다.

'구름의 바다'라는 표현이 딱 맞아떨어지는 노고단의 아침 운해를 뒤로 하고 연하천으로 발길을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오르락내리락 완만한 능선의 연속이다. 주변 경관을 구경할 수 없어 답답했던 화엄사 길과는 달리 지리산의 절경 곳곳을 감상할 수 있다. 인간세상의 기계음에 익숙해진 내 귀에 "삐리리 삐릿" 산 새소리는 너무 완벽한 기계음 같이 들렸다. 그 새 소리에 휘파람 소리로 답하며 걸으니 지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반야봉이다.
하지만 반야봉은 구름을 잔뜩 물고 있는 채 그 능선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성취의 만족감에 더뎌질 나의 안일한 마음을 짐작했을까. 구름낀 반야봉은 나의 발길을 천왕봉으로 재촉한다.

고된 산행의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은 바로 사람과의 조우일 것이다. 산을 오르고 있다는 공통분모는 금새 미소 한 번에 소주 한 잔 나눌 수 있는 친근함을 만들어 낸다. 연하천 산장지기 노시철씨가 10년이 넘는 세월을 연하천 골짜기에서 보낼 수 있었던 힘도 바로 계절마다 지리산을 찾아주는 사람들 덕분이었으리라.

"지리산은 현명한 산이지.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 끝에 삶의 방법을 배울 수 있으니까" 부인이나 가족보다 지리산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을 그에게도 여전히 지리산은 자신과의 싸움터였다. 35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기 위해, 건강을 위해, 세상에 단련되기 위해. 시민의 소리 기자 모두 나름의 이유로 지리산을 찾았지만 지리산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한가지였다. 자신과 싸워라. 그리고 이겨라.

"자신과 싸워라 그리고 이겨라"


지리산에서 보내는 셋째날, 연하천에서 장터목까지 길은 별 무리 없어 보였다. 천왕봉까지 완만해 보이는 산길. 능선도 부드러워 보였다. 하지만 막상 떠난 장터목까지 길은 녹록치 않았다. 이틀간의 피로가 두서근의 무게로 달려 자꾸 내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옮기다 보니 다른 생각들이 끼여들 틈이 없었다. 그렇게 무념무상의 상태로 발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북적 북적 장터목이다.


종주에 가까워졌다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후발대로 떠나온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똑같은 무게의 땀방울을 흘리며, 같은 곳을 향해 온 그들을 산에서 재회하는 기쁨은 며칠간의 육체적 고단함을 보상받고도 남을 만큼 벅찬 감흥이다. 적은 양의 소주로, 깊은 정을 나누며 지리산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산은 정직했다. 부지런히 정상을 향해 달려온 인간에게 지리산은 천왕봉 일출로 보답해 주었다. 아둔한 인간 세상을 향한 탄식에서 태어났을 구름의 바다, 그 아래로 뻗어있는 봉우리 위로 번진 붉은 빛. 찰나였다. 빠알간 해가 구름 바다에 밀려 오르듯 솟아 올랐다.
천운이 따라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 제각각의 사연을 갖고 천왕봉에 오른 많은 사람들은 감격했다. 3박 4일의 고통에서 배운 인내는 이렇게 달콤하고 장엄하다. 다시는 보지 못할 그 일출을 눈에 단단히 박아두며 지리산 아래로 몸을 향했다.

천왕봉을 거쳐 지나온 지팡이는 족히 4㎝는 닳아 있었지만 지리산 숲을 지나온 내 마음의 키는 훌쩍 커 있었다. 백무동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하산길, 훔쳐보는 지리산 곳곳의 능성이 위로 앞으로 펼쳐질 6개월간의 수습기자 생활이 겹쳐진다. 그리고 자신감 있는 미소가 내 얼굴에 번진다. 한 순간 소낙비를 맞더라도, 돌 언덕에 무릎이 깨지더라도 절대 좌절하지 않을 자신. 목표를 향한 방향키를 놓치지 않고 걸어갈 자신. 지리산에서 배운 인내와 성취의 가르침이 나를 자신있게 세상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