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당과 춘원 그리고 운동권의 정치참여
육당과 춘원 그리고 운동권의 정치참여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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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벽초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 문재(文才)로 일컬어진다. 해방 이후 벽초 홍명희는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 받았으나 육당과 춘원은 친일파로 몰려 반민특위 법정에 섰으니 그 말년의 삶이 참으로 대비되었다.


육당은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공약3장을 지어 일약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이 사건으로 2년 6개월이나 옥고를 치렀다. 춘원은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신문 발간 일에 앞장서왔다.


이러한 육당과 춘원이 변절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친일행위를 일삼았고, 일제말기 일제의 대동아 침략전쟁이 한창인 1943년 11월에는 동경 메이지 대학 대강당에 나란히 서서 학도병 궐기대회 연사로 참여하였다.


육당과 춘원 이외에도 일제시대 초기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많은 지식인들이 변절하여 친일의 길로 들어서 역사를 더럽혔으니 지식인들이 지조를 지키며 일생을 변치 않고 한번 품은 뜻을 지켜가기란 쉽지 않은 일인 듯 싶다.


70년대 유신의 폭압과 80년대 군부독재의 압제에 맞서 폭풍의 노도가 일 듯 민주화운동이 폭발하던 시기 많은 대학생들이 라면 몇 가닥과 막걸리 한 사발로 배를 채우며 입신양명을 버리고 거리에 몸을 던졌다.


노동자들이 일어서고 농민들이 함께 일어서 군부독재는 끝장났고 민간정부가 등장하고 민주화의 길도 열리기 시작했다. 민주화운동세력은 국민들이 존경하는 집단이 되었다. 유신과 군부정권에 앞장섰던 수구세력마저도 자기들을 근대화 세력이라 자칭하며 근대화세력과 민주화운동세력이 힘을 합쳐 나라를 운영하자고 나설 정도였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두번의 민간정권이 들어섰고 상대적으로 사회의 민주화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많은 사람들이 열려진 정치공간에 참여하여 참신함과 도덕성을 무기로 민주화의 진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화운동 경력이 정치에 진출하는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 민주화운동 경력은 국민들에게 별다른 호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운동세력과 손을 잡겠다던 수구세력은 이제 민주화운동세력이 나라를 망친 장본인들이라며 내치고 그들만의 정치를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올바른 정치를 해보겠다고 현실정치에 참여한 민주화 운동가들은 이리 저리 뿔뿔이 흩어진 채 자기 자리 지키기도 버거워 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존경의 대상이었던 민주화 운동가들이 무능하거나 개인 출세주의자로 격하되었다. 나아가 냉정한 비판가는 제도정치 참여자들을 변절자 취급하고 있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던 순수한 열정으로 헌신했던 민주화 운동가들이 제도정치권에 참여했다라는 이유만으로 변절자 취급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에 참여했거나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이나 세력은 국민들의 따가운 비판에 다시금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춘원의 민족개조론은 일제의 조선민족개량론과 맞닿은 '지식인 중심의 세계관'이었으며 육당의 학자적 양심이라는 것이 조선 민중의 삶과는 무관한 철저한 개인주의적 세계관이었다.


이는 춘원과 육당의 변절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오늘 국민들의 제도정치에 참여한 민주화운동가들에 대한 비판도 사실 이러한 민중적 요구의 표출이 아닌가 싶다.


낡은 것에 저항하는 대중의 힘의 결집 없이 올바른 정치는 세워지지 않을 것이며 이유 없이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를 헤매는 노동자들의 삶과 무관한 정치는 개인의 출세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다.



한 때 조국을 위해 몸 바쳤던 열정이 현실정치에서 올곧게 이어 질려면.정치에 투신한 분명한 이유와 누구와 함께 정치를 해야 하는 지가 명확한 정치철학을 굳건히 세우는 정치참여의 출발이 필요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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