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해서 즐거운 산골생활을 아시나요?
심심해서 즐거운 산골생활을 아시나요?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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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아재아짐들은 일년이 가도 책 한 권 읽지 않습니다. 농민신문이니 그냥 배달돼 오는 신문도 거의 읽지 않는 듯 합니다. 밤이 되면 그냥 저냥 테레비는 켜 놓는 모양입니다. 동네 고샅길을 산책하다보면 테레비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이 요란합니다. 테레비가 바깥 세상을 보는 유일한 창인 셈입니다.(지난 유월 월드컵 때는 테레비가 없는 우리 집이라 하늘이와 밤이면 철애 아재 집으로 주요 경기를 보러 자주 갔었습니다. 그런데 아재는 고단한 노동의 피로를 어쩌지 못하고 전반전이 끝나기도 전에 잠들기 일쑤였습니다.) 그렇지만 테레비에서 쏟아내는 온갖 사건과 정보들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는 아닙니다. 농사를 지으며 몸으로 체득한 철학으로 세상사를 보는 거지요. 자연과 함께 짓는 농사라는 실천적 컨텍스트 속에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세상사를 단순 명쾌하게 해석하는 힘이 있는 거지요. ©사진작가 마동욱

아재아짐들은 책 한 권 읽지 않고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고있는 셈입니다.(보수적 정치의식이나 도시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묵묵히 땅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재아짐들 같은 농부들입니다.) 나 같은 신출내기는 아직 따라갈 수 없지만 어쩌면 시골은 말보다는 먼저 몸으로, 그것도 아주 육감적으로 움직이며 사는 공간인 듯 싶습니다.

몸으로 체득한 철학의 힘

여기까지 글을 쓰는 동안 방안에는 안숙선 명창의 남도민요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오디오에서 울려 펴진 노래가 끝나니 금방 적막강산입니다. 이내 다른 소리들이 문 밖에서 방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방문을 열고 나가 천천히 거닙니다. 비가 그친 산야에 산들바람이 불어 너무나 상쾌한 내음으로 가득합니다.

일 주일전 집 주변 곳곳에 뿌려놓은 메밀 씨앗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연초록 떡잎 두 장씩을 가는 팔목에 매달고 바람에 흔들립니다. 그 속에서 아주 어렸을 적 고무줄 놀이하며 뛰어 놀던 동네 여자얘들이 손뼉치며 까르르 뛰어나올 것만 같습니다.

▲문씨의 아내가 정성스레 가꾸는 텃밭. ©사진작가 마동욱

마당 한 켠에는 아내를 아주 황홀한 지경으로 몰입시키는, 손수 가꾼 손바닥만한 여름무 밭이 있습니다. 여느 도시인과 마찬가지로 사먹는 것만 익숙하던 아내가 손수 씨앗을 뿌리고 하루 하루의 놀라운 성장을 지켜보며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소꿉장난 같은 텃밭이지만 생명의 신비를 알아차리기에는 충분한 모양입니다.

눈을 들어 귀를 여니 온갖 이름 모를 새들이 노래합니다. 텃밭에는 하얀 나비가 팔랑팔랑 춤추며 어린잎들을 희롱합니다. 그 앞에 드러누운 우리 집 개, '보고'(이제 보고는 강아지가 아니라 님을 찾아 길을 떠나는 당당한 숫개가 되었습니다. 엊그제도 님을 보러 십 리나 되는 아랫마을로 말도 없이 마실을 가 겨우 데려 왔습니다.)는 방학을 해 외할머니집에 가버린 하늘이가 없어 심심한지 연신 하품타령입니다.

자연의 소리로 이내 방안은 충만해지고....

아랫녘 콩밭에선 새순을 쪼아먹는 새들에게 소리치는 유성아짐의 흉내낼 수 없는 소프라노 음성이 들리고 집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선 물 흐르는 소리가 경쾌합니다. 오늘은 분명 기분 좋은 날입니다. 이 온갖 소리가 다 들리니 말입니다. 그러니 아내가 사다 놓은 수많은 CD음반 속의 음악은 어쩌다 쓸쓸할 때 들어야 제 맛이 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록에 취해 어지러워 방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리저리 널려있는 이런저런 책들에 눈이 갑니다. 요즘같이 무더운 대낮에는 쉬원한 흙방에 누워 책보는 것이 피서이자 즐거움입니다. 이 시간에 아재아짐들은 달디단 낮잠으로 원기를 회복하겠지만 나 같은 먹물은 글 속에서 즐거운 활력을 찾기도 합니다.

수몰마을 행사를 생각하며 <관광과 문화>를 뒤적여 보기도 하고 내 삶을 고무 찬양하기 위해 <여기에 사는 즐거움>도 펼쳐 봅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 이내 시집 한 권을 들고 앞마당 평상에 가 앉습니다. 눈으로만 읽으니 너무나 심심해서 큰 소리로 낭송하니 내 몸이 열리며 무장무장 즐거워집니다.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 집으로 가는 길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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