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분신, 나의 땅 그리고 쌀
나의 분신, 나의 땅 그리고 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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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흐리다. 비가 올 것 같다. 장마가 시작된다기에 약간 걱정도 된다. 오늘은 진도군에 있는 신정마을 회관에서 마을사람들과 농민회 식구 그리고 100인 100일 참석자와 함께 기원제를 지낸다. 어제는 변산 유기농 생산자들과 밤새 이별식을 했다.

6월 29일까지 서울에서 농업회생연대가 주최하는 100인 100일 걷기 준비를 하기 위해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에서 지내고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머리를 깎았다. 머리를 깎고 나니 승복 생각이 난다.

집에 오니 아내가 치복에다 숯으로 염색을 해두었다. 영락없이 승복이다. 아내와 작별인사를 하고, 애써 가꾼 밭을 둘러보았다. 감자 캔 밭에 수수 모종을 옮겨 심은 지 보름 가까이 지난 지금 흙 기운을 느끼고 곧 자랄 것 같은 모습이다.

아내와 장모, 그리고 이웃집 아주머니. 어디가나 남은 노인네들만이 땅을 지키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흔 먹은 노인네가 밭을 메고 있는 모습이 왠지 살살한 느낌이다. 나는 농업 지킨다고 쌀 지킨다고 서울 오르락 내리락하다가 결국 머리를 깎고오니 "어디 보자. 얼마나 이쁜지. 모자 벗어볼래. 오-메 태영엄마 신랑 머리 깎응께 이쁘네" 하면서 웃는다. 아내에게도 역시 살살한 느낌이다.

노인네들만이 지키는 땅

유기농업 한다고 이날 이때까지 호미 한 자루로 밭 메느라 코 앞이 바다인데 해수욕 한 번 가지 못하고 젊음을 땡볕에서 보냈다. 그런데다 또 서방이란 작자는 함께 가정을 책임지지 않고 걷기 운동 한다고 떠난다니 서방의 빡빡 깎은 모습을 보면서 옛날 생각이 난단다.

그 옛날,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보고 아저씨라 부르길래 화가 나서 머리를 빡빡 깎은 기억 말이다. 하지만 이젠 옛날의 총각, 처녀도 아닌 불혹을 넘어선 사십 중반에 접어들었다.

땅 살리자고, 생명 있는 농산물 생산하자고 그렇게 생계를 꾸려보자고 농사짓고 몸부림 친 지난 20년의 세월은 나의 아내에게는 고통과 고난 그것이었다. 아내는 매사 철저하게 일을 처리하는 성격이어서 콩, 수수, 기장 등을 막대기 하나로 탈곡하고 키질한다. 그러면 먼지로 더운 여름에도 마스크를 쓰고 일을 해야한다.

나는 고통스런 현실과 아픈 허리 때문에 술로 괴로움을 달래며 일했지만, 이젠 더 이상 오늘의 농촌 현실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분신인 이 땅도 언젠가는 자본의 논리로부터 지킬 수 없다는 불안감에 빠지고, 이른바 무한경쟁 WTO 체제에서 우리 농업이 겪을 위기를 시간이 지날수록 강하게 느낀다. 이젠 더 이상 나란 존재가 호미 한 자루로 내 땅에서 풀만 매고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쌀지키려 걷는 길

'우리 쌀 지키기 100인 100일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지금 나는 진도로 간다. 12년 전부터 지금까지 생과 사, 고통과 고뇌, 즐거움과 슬픔 모두 함께 지켜봐 주신 한울 생협 대표인 이덕자 님과 함께 간다.

이덕자 님은 나를 만난 뒤로 순수한 마음 하나 가지고 농사를 짓는 사람 하나 도우고자 했던 만남이 이젠 700명의 소비자 회원을 둔 생협 이사장이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생산자와의 만남이 악연이며 이사장이라는 이름을 통해 여러 사람으로부터 느끼는 말 한마디의 아픈 상처로 그이는 결국 울음을 토했고, 순간의 기쁨과 여기까지의 성취욕보다 더 아픈 상처의 괴로움은 슬픈 울음이었다.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생협에서 소비를 책임진 소비자 역시 생산자와 함께 아픈 상처를 느끼면서 울어야했고 그래서 악연이라 하니 더더욱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조용히 손을 잡으면서 이 무거운 마음을 같이 나눈다.
(2002.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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