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으니까 사는 것'
'살아 있으니까 사는 것'
  • 문틈 시인
  • 승인 2023.04.2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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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은퇴하고 나자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한두 해는 직장에 출근을 하지 않고 집에서 노는 것이 행복하기만 했다. 시간에 속박받지 않고 해방감을 맛보며 지내는 것이 좋았다. 산에 가고 싶으면 산에 가고, 개천가를 따라 산책을 하고 싶으면 또 그렇게 했다.

이러려고 내가 젊은 날 열심히 일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먹고 살기 위해 버둥거리지 않아도 되지, 건강도 나쁘지 않지, 남들은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 저녁 늦게 귀가하는 힘든 삶을 사는데 나는 그 단계를 지나와 마치 산 봉우리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처럼 여유를 만끽했다. 지난날 열심히 일한 보상을 받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하릴없이 이렇게 사는 것이 지겨워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삶이 무의미해지려고 했다. 이렇게 아무 할 일 없이 날마다 놀고 사는 것이 결코 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내 삶에 무엇인가 다른 빛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느낌에 시달렸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으로 내 생의 후반을 보내는 것은 크게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시간은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자고 나면 토요일이었다. 엊그제 토요일이었는데 금새 또 토요일이 왔다. 시간의 흐름을 피부에 느낄 정도였다. 시간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그대로 있으면 우울증이 덮쳐 올 것 같았다.

직장에 다닐 때는 무료하거나 심심할 틈이 없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할 일이 있었다. 사람들과 만나고 떠들고 다투고 웃고 헤어졌다. 날마다 바쁘게 살았다.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저축을 하고, 집을 사고, 아이들을 기르고, 부모를 봉양하고, 그 모든 일들을 행하는 데 힘이 들 때도 있었지만 성취의 여정에 보람이 있었다. 하나의 목표를 이루면 다른 새 목표가 다가왔다. 회사의 사장은 일을 열심히 한다며 따로 불러 봉투를 내밀기도 했다. 그런 일들이 내게 기쁨을 주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열심히 일하는 중에도 늘 어서 목표를 달성해서 편안하게 지낼 날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직장 일이란 내가 언젠가 맞이하고 싶은 편안한 날로 가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은 동료들과의 경쟁과 업무 스트레스와 조직 안에서의 갈등의 연속이었지만 인내를 약으로 삼아 견뎌냈다.

직장은 일만 잘한다고 열심히 한다고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가 원만해야 하고, 때가 되면 승진도 해야 하고, 승진에서 탈락하면 자격지심에 짓눌려 지내야 한다.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다.

이제 그 질풍노도 같은 직장에서의 생활에서 해방되어 그렇게도 그리던 편안한 날을 맞이했다. 직장을 은퇴하자 내 앞에는 자유, 해방, 평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나가고 은퇴 후의 삶은 점차 시들해졌다. 특별한 목표가 없으니, 경쟁이 없으니, 업무 스트레스가 없으니, 삶이 맹물을 마시는 것처럼 아무런 자극도, 신선함도, 성취감도 없었다.

마치 집안의 가구처럼 나는 그냥 여기 맨날 놓여 있을 따름이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가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일까? 나는 평생 책을 읽고 쓰고 만드는 일을 해온 사람이었으므로 책은 늘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책을 읽는 것은 내 생의 오랜 시기 동안 즐거움이었고,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것 말고 은퇴 후의 여정에 나는 정말로 무엇인가가 더 필요했다. 내 삶을 채워줄 영원한 그리움 같은. 그런데 그것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나는 모른다. 어쨌든 지금 이런 식으로 내 삶이 흘러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나를 나로 인증하는 나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이 그것인지 모른다. 내가 나에게 확인시켜 주는 존재감 말이다.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사업이다. 젊었을 적에는 그렇게도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을 바랐으면서도 막상 아무런 구속과 제약이 없는 편안한 인생의 후반을 살면서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부족하다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때로 허무감에 사로잡혀 사는 내 모습이라니.

어머니가 언젠가 내게 해주신 말을 답으로 제시한다. 인생은 ‘살아 있으니까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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