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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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두 여자가 있다. 두 여자 모두 80년대를 열심히, 끈질기게 살아온 소위 386세대다. 투쟁을 같이 하던 동지를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를 의심치 않던. 그때는 너무도 절실했던 인간의 자유와 소외, 계급 문제와 노동 문제 등을 밤새 고민하고 토론을 벌이며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사상을 확립해 나갔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사유재산제로 파생된 가부장제 사회에 대해서, 그 사회 속에서 여성이 떠맡아야 하는 양육과 가사 노동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선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데서 이 소설은 출발한다.

운동권 남편을 둔 인실.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딸만 둘이다. 그리고 그녀가 번 돈으로 생활을 해 나간다. 남편은 대의를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으며 그 대의를 위해선 가족이라는 이름도, 남편이라는 이름도, 아버지라는 이름도 이름뿐이다.

아이를 기르는 일도, 돈 버는 일도 모두 인실의 몫이다. 시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두둔한다. 여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권력을 잡는 때가 시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진 때라고 했던가. 시어머니는 아들도 낳지 못하는 며느리를 탓한다.

반듯이 누워 잠자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인실은 절규한다. 당신은 스무살 때 계급제도와 여성의 소외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했는지, 서른이 넘었을 땐 이 땅에서 가부장제 사회라는 걸 어떻게 몸으로 느꼈는지, 당신 딸들의 미래에 대해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잠든 시어머니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누가 저 여자의 가치관 속에 남성은 여성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라는 편견을 심어놓았는지, 그래서 아들, 아들하게 만들었는지...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내 아이가 될 수 있을 때까지 그런 이상향이 도래할 때까지 애를 낳을 수 없다던 수민의 남편. 수민은 아이를 낳고 아이의 생일 때 여행길을 떠난다. 오히려 수민은 자궁안에서 자신의 아이를 키우면서 세상의 모든 아이를 사랑하고 모두가 소중하게 느껴짐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두 여자는 이혼을 통해 스스로 당당하게 일어선다. 수민은 잠시 다른 남자를 통해 자신에게 자상한 남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안락함을 맛보긴 하지만 자신의 아이에게까지 좋은 아버지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를 포기한다. 이제부터는 누구의 마누라도 누구의 엄마도 아닌 여성,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아팠음을 고백해야겠다. 이 이야기는 어느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며, 내 이웃 여자의 이야기이므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몇 달 전 아들 못 낳는다고 구박받다 자살한 어느 여자의 이야기가 떠올라 마음이 아팠고, 누가 보기에도 정말 금슬 좋던 부부였는데 아내가 자살했는데 남편이 입이 귀에 가 걸려있더라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마음이 아팠다.

"딸 가진 죄인"이라는 말이 지금도 여전히 유통되고 있고 여자들에겐 억압의 굴레가 너무도 많다. 그래서 가끔은 가진 자에 편승하기 위해 가진 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의 눈으로 사람을 재단하기도 했을 것이다. 나 하나만 참으면 되지 하는 말도 안되는 자기 비하도 했을 것이고.. 그래서 착한 여자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자율적이고 주체적이어야 한다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 남성임을 인식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학습되어진 사회가 우리 사회다. 오죽하면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을까.

마늘을 까는 것보다 신문을 읽는 아내를 자랑스러워 하는 남편을 기대한다는 것은 정말 우리 남편 말대로 '드라마' 같은 일일까. 아내가 공부함으로 인해 가족들이 조금 불편해져도 그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이 가족이 아닐까. (남편들은 당장의 불편함을 못참는다.

그동안 아내가 얼마나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고.) 그것도 우리 남편 말대로 내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갖는 환상일까.(사실 난 드라마 잘 보지도 않는데, 우리 남편은 내가 드라마를 아주 열심히 봐서 드라마에 세뇌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가진 자의 발언일까.)

김연/제2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한겨레 신문사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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