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33회]-웅포해전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33회]-웅포해전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4.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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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9월 1일 부산포 해전 이후 이순신은 더 이상 출전하지 않았다.

경남 통영 충렬사 전경

 1593년 1월 25일에 안세걸이 선조의 유서를 가져왔다.
“1월 8일에 이여송이 평양을 수복하고 계속 진군하니 그대는 수군을 정비하여 바다 길로 도망치는 왜군을 섬멸하라”
이에 이순신은 2월 6일에 출전하였다. 이순신은 7일에 경상 우수사 원균, 8일엔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만났다.

2월 10일에 조선 연합함대 89척(전라좌수군 42척, 전라 우수군 40척, 경상우수군 7척)은 웅포(창원시 진해구 웅포동 소재)로 향했다.

당시 웅포는 왜군이 다시 집결하여 산록에 수군 진지를 구축하고 주변인 안골포·영등포· 가덕도 등지에 요새지를 두어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대로 조선 수군을 철저하게 회피한 것이었다.

2월 10일에 연합함대는 왜적을 두 번이나 꾀어냈으나 우리 군대에 지레 겁을 먹고는 나올 듯 하다가도 들어가 버려, 밤 10시경에 소진포(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로 돌아와 배를 대고 밤을 지냈다. 11일에 이순신은 소진포에 머물렀다. 12일에 이순신은 웅포로 진격했으나 여전히 왜군은 웅크리고 있었다.

2월 17일에 이순신은 거제 칠천량 앞바다에서 선전관 이춘영으로부터 ‘적들이 돌아가는 길목에 빨리 나가서 도망치는 적을 몰살하라’는 선조의 유지를 받았다.
이순신은 교지를 받았다는 회신을 하면서 웅천의 적을 수륙으로 협공할 것을 아뢰었다.

2월 18일에 조선 수군은 웅포의 왜군에게 3차 공격을 시도했다.
왜군들은 여전히 응전하지 않았다.
이러자 이순신은 유인작전을 시도했다. 그는 사도첨사 김완을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여도만호, 녹도가장, 좌우별도장 및 좌우 돌격장 등을 거느리고 송도에 복병하게 한 후 여러 전선을 포구로 돌진시켜 왜선이 나오게 유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왜선 10여 척이 뒤따라 나오는 것이었다.

이때 이순신의 군관인 주부 이설과 좌돌격구선장 주부 이언량 등이 도망가는 왜선 3척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 배에 타고 있던 100여명을 사살했다.

한편 왜군이 육지에만 머물고 있어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김성일에게 두 번이나 육군의 웅천 공격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김성일은 “명나라 군사를 대접하는 일에 경황이 없고 또 남아 있는 군사도 없으므로 첨지 곽재우를 시켜 먼저 창원을 무찌른 다음에 웅천으로 진격하라고 하였다”고 답했다.
하지만 곽재우는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

19일에는 서풍이 크게 불어 출발하지 못하고 20일 새벽에 사화랑을 떠나 강풍을 맞으면서 웅천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투가 시작될 즈음에 갑자기 큰바람이 불었다. 전선들이 서로 충돌하여 파손되어서 배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이순신은 즉시 호각을 불고 초요기를 세워 전투를 중지시켰다.
다행히 모든 전선이 크게 손실을 입지는 않았으나 흥양 1척, 방답 1척, 순천 1척, 본영 1척이 서로 부딪쳐 크게 파손되었다. 전라좌수영 전선 네 척이 크게 파손되기는 처음이었다.

2월 21일에는 강풍에 비까지 내렸고, 22일에도 새벽에 동풍이 세게 불었다. 그러나 적을 치는 일이 시급하여 이순신은 출항하였다. 사화랑에 이르러 바람이 약해지자 이순신은 길을 재촉하여 웅포에 다달았다.

2월 22일의 전투상황을 ‘난중일기’를 통해 살펴보자.

“삼혜와 의능 두 승병장과 의병장 성응지를 웅포 서쪽인 제포로 보내어 상륙하는 체하게 하였다. 또 전라우도 여러 장수의 배 가운데 튼튼하지 못한 것을 뽑아서 동쪽에 보내어 상륙하는 체하게 하였다. 그러자 왜적들이 감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였다. 이 때 배를 모아 일시에 뚫고 들어가니 적의 세력이 흩어지고 힘이 약해져서 거의 섬멸하였다.

그러나 발포 2선,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얕은 곳에 걸려서 적들에게 공격당하고 말았다.0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전라좌수사)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냈다. 그런데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2월 28일에 이순신은 새벽에 출항하여 웅포에 이르렀다. 웅천의 적들은 여전히 웅크리고 있었다. 이순신은 낙동강 하구까지 진출했다가 사화랑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3월 6일에 이순신은 7차로 웅포를 공격하니 적의 무리들이 급히 산 중턱으로 도망쳐서 진을 쳤다.
이에 조선 수군들이 탄환과 화살을 비오듯 퍼붓고 비격진천뢰를 쏘니 왜군들이 많이 죽었다. 3월 8일에 이순신은 한산도에 되돌아왔다.

그런데 조선 수군이 출전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명군의 소식은 아득하여 전혀 알 길이 없고, 농사철을 맞이하여 연해안 각 진의 수군이 모두 출전하여 농사에 차질이 생겼다. 특히 전염병이 생겨 사망자가 연달아 생겼다. 4월 3일에 이순신은 출전을 종료하고 각자의 본영으로 돌아갔다.

웅포해전은 이순신에게는 불운이었다. 전라좌수영 배 4척이 파손되고, 1척이 전복된 것이다.                                                                                                           <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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