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32회]-행주대첩 (2)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32회]-행주대첩 (2)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4.12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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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2월 12일에 하루 종일 일곱 번 싸운 행주산성 전투를 계속 살펴보자.

변이중의 화차 (행주산성 대첩기념관)
행주산성 대첩기념관에 있는 변이중의 화차

왜군은 여러 번 공격하였다가 번번이 퇴각하였는데 이번에는 제5 대장 키카와 히로이에가 나섰다. 왜적은 갈대를 가지고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불을 놓아 제2 성책을 불태우려 하였다. 이러자 성안에서는 황급히 물을 끼얹어 불을 꺼버렸다. 그러나 왜군은 불화살을 집중하여 쏘아 목책 일부가 불타기 시작하였다. 조선군은 침착하게 미리 준비한 물통으로 불을 끄고 화살과 돌을 퍼부으니 일본 제5 대장 키카와 또한 부상을 입고 물러났다.

이어 제6 대장 모리 모토야스는 힘을 다하여 제2 성책을 점령하려고 맹공을 가하였다. 이때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제자인 승장 처영은 1천 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적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냈다. 적들이 근접하자 재주머니의 재를 뿌려서 적이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전법까지 전개하여 왜군은 마침내 물러갔다.

이제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왜군은 초조했다. 왜적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공격방향을 바꾸었다.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격파한 제7 대장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선두에 서서 승병이 지키고 있는 서북쪽의 자성을 공격하여 그곳의 일각을 뚫자 승병이 붕괴되어 내성으로 들어와 일진(一陣)이 헤져지고 쓰러졌다. 이에 권율이 칼을 빼어 들고 승군에게 총공격을 명령하자 다시 승군이 힘을 내어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옆 진영에 있던 조선군들도 적을 향하여 수많은 화살을 집중 발사하니 전투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때 조선군은 화살이 다하여 투석전을 폈는데 왜군이 이를 알아차리고 기세를 올리려 하였다. 이때 충청수사 정걸(1514-1597)이 배 두 척에 화살을 싣고 바다 쪽에서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이에 조선군은 사기가 충천하였다. 이어서 전라도 조운선 40척이 도착하여 양천 포구를 뒤덮으니 왜군은 지원군으로 착각하고 말았다.

패배를 인정한 왜군은 시체를 네 군데에 모아서 불태우고 서울로 퇴각하였다. 왜군은 총대장 우키다를 비롯해서 키카와, 이시다, 마에노 등 4명의 장수가 부상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전투로 조선 육군은 일거에 명예를 회복하였다. 2,300명의 군사로 
열배가 넘은 3만 명의 왜군을 물리친 쾌거였다.

다음날 명나라 부총병 사대수(査大受)가 접전한 곳을 와서 보고 말하기를, "외국에 진짜 장군이 있다." 하였다.

명나라 경략 송응창은 우리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 위로하고 칭찬하는 한편 비단과 은(銀)을 상으로 주고 황제에게 주문(奏聞)하였다. 명나라 신종 황제는 홍려시(鴻臚寺)의 관원을 보내 우리나라에 선유(宣諭)하기를, "조선은 본디 강국으로 일컬어졌는데, 지금 보건대 권율이 참획한 것이 매우 많으니 그것을 알 수 있겠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3년 2월 1일 8번째 기사)

변이중의 화차가 있는 행주산성 대첩기념관
 행주산성 대첩기념관

그러면 행주대첩의 승리요인은 무엇인가? 이는 조경의 선견지명과 권율의 지휘, 그리고 전라도 관군과 의병·승병 그리고 행주 백성들의 투혼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공로는 망암 변이중(1546~1611)이 만든 화차였다.국방 과학 신무기 화차는 전라도 관찰사 권율 자신 스스로 “행주 전투에서는 진실로 화차에 힘입어 승리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고,

『간양록』의 저자 수은 강항이 지은 변이중 묘지명에도 ‘중흥의 공은 행주가 제일이고, 화차의 힘이 많았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정조 임금도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때 소모사 변이중이 처음으로 화차를 만들어 한 차에 총구 40개를 뚫어서 연속발사가 되게 했다. 전라순찰사 권율의 행주대첩은 이 화차에 힘 입은 바가 크다” 했다.

(『홍재전서』 권13 군기인 軍器引)

한편 변이중은 전남 장성군 봉암서원에 모셔져 있다. 승장 처영의 진영(眞影)은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표충사(表忠祠)에 서산대사 휴정 · 사명당 유정과 함께 봉안되어 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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