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는 날
눈이 오는 날
  • 시민의소리
  • 승인 2023.01.19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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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창유리로 비치는 눈 내리는 풍경을 본다. 나무들은 나무들대로 가만히 서서 눈을 맞고 있다.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듯하다. 지상의 모든 것들이 눈이 오는 것을 조용히 안아 들이고 있다. 그리고는 눈에 덮여 서서히 제 모습을 조금씩 감추고 있다.

내가 자주 가던 숲으로 난 오솔길도 눈이 내려 하얗게 덮여 있다. 나는 이 풍경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심정으로 눈이 내리는 바깥 풍경을 경이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도무지 이 세상 같지 않다. 갑자기 하늘이 마법을 걸어 지상 세계를 짠, 하고 바꿔 놓은 것일까. 보면 볼수록 놀라운 풍경이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언제 이 세상이 이렇게 맑고 깨끗하고 신비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정녕 눈에 쌓여 모든 것들이 하얗게 덮인 풍경은 동화의 나라 같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손을 뻗어도 결코 닿지 않을 것 같은 경이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다.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뭐랄까, 흡사 나는 지금 우주선을 타고 외계의 어느 별에 막 도착한 기분이다.

눈이 오지 않을 때도 나는 가끔 내가 이 지구별에 우주인으로 날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만약 인류가 그 언젠가 다른 별에 가서 그곳의 자연의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바로 지금 내가 지구별에서 느끼는 이 놀라움 같은 것이 아닐까.

하얀 눈송이들이 만물을 감싸 안은 풍경은 내가 지상에 거주하는 인간이 아니라 천상에 사는 듯한 황홀한 느낌을 안겨준다. 아파트 거실 창을 열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눈의 나라 시민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함께 살아가라고. 내가 소리친 메아리는 설국을 돌고 돌아 눈송이들과 함께 지상에 내려앉을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은 그지없이 고요하고 착해지는 듯하다. 이 순간 나는 아무런 욕심도, 고통도 없다. 저 세상이 있다면 바로 이런 풍경의 세상일지 모른다. 나는 며칠 전 아버지 제삿상에 올렸던 귤을 하나 꺼내 들고 껍질을 깐다.

귤은 얇은 껍질 안에 작은 조각들이 서로 엉겨 붙어 있다. 한 조각씩 떼어먹기 좋게 무슨 구조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귤 한 조각을 떼어 입에 넣으며 눈송이들이 내리는 풍경을 계속 바라본다.

눈이 오는 날은 집안에서 단맛이 상큼한 귤을 하나씩 까먹는 것이 딱 어울린다.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차가운 귤을 먹노라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느낌이 든다. 굳이 귤이 겨울에 나는 이유가 따로 있을 듯하다.

거실 창을 열고 하늘을 쳐다보니 눈송이들이 하늘 가득하다. 끝도 가도 없이 내린다. 펑, 펑, 수수만만의 눈송이들이 퍼붓듯 내린다. 눈은 아파트 단지에 듬성듬성 심겨 있는 나무들에도 감싸듯이 내려 쌓인다. 나무의 우듬지 실가지에도 가만히 내려서 쌓인다. 마치 가지들을 은박을 하듯 눈으로 살포시 감싸는 모습이 세상을 온통 눈으로 만든 시트 자락으로 덮고 있는 듯하다.

겨울 눈 오는 날 새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숲은 그지없이 적막하다. 만일 내가 숲에 들어가서 크게 한마디 소리를 외친다면 나무를 덮고 있는 눈들이 일제히 떨어져 내릴 것만 같다. 그러므로 눈이 오는 날은 아무 말도 하지 말 일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세계와 나는 통한다.

평소 떠들썩하니 말을 많이 하던 세계는 지금 오직 눈에 덮인 모습만을 보여 준다. 침묵, 그리고 침묵. 오직 말없음을 보여 주는 저 도저한 눈이 내린 풍경. 나도 거대한 침묵 속에 발을 디뎌 보고 싶다.

봄, 여름, 가을 동안 나는 쓰잘데 없는 말들을 너무나 많이 했다. 아니 해도 될 말들, 말, 말들, 그냥 말하기 위해서 한 말들을. 눈이 내리는 날에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말보다 침묵이 더 의미가 깊다는 것을.

눈이 오는 날은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 보인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인다. 그 길을 따라가서 나는 오랜만에 나 자신을 만난다. 눈이 오는 날은 나를 회복하는 날이다. 진정한 나,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나목들처럼 나는 오래 눈을 맞고 서 있다. 나는 눈 속에서 비로소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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