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17회]율포 해전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17회]율포 해전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11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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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7일 웅천 땅 증도(甑島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리) 해상에 이르러 진을 쳤는데, 오전 10시쯤 탐망 선장의 보고가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해전도

“가덕 바다 위에서 왜인 3명이 배 한 척에 타고 있다가 우리를 보더니 북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추격하여 적 3명을 모두 쏘아 죽이고 머리를 모조리 베었습니다. 그중에 머리 1급은 경상우수사의 군관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림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위력으로 강탈해 갔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출발하여 정오경에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앞바다에 이르렀다. 조선함대는 율포(栗浦 거제시 장목면 율천리)에서 나와 부산 쪽으로 도망하는 일본의 대선 5척과 중선 2척을 발견하였다.

조선 수군은 역풍을 받으면서 율포 앞 2km 근해까지 긴박한 추격전을 벌였다. 일본 수군은 배 안에 실은 짐짝을 모두 바다로 던지면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율포해전은 속전속결로 끝났다. 우후 이몽구가 왜 대선 1척을 나포하고 머리 7급을 베고 또 1척을 불태웠고, 사도첨사 김완은 대선 1척을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20급을 베고, 녹도만호 정운은 대선 1척을 사로잡아 머리 9급을 베었다. 광양현감 어영담과 가리포첨사 구사직은 힘을 합해 왜 대선 1척이 육지로 내릴 때 추포하여 불사르고, 구사직은 머리 2급을 베고, 여도권관 김인영은 머리 1급을 베고, 소비포 권관 이영남은 소선을 타고 돌입하여 뒤쫓아 쏘아서 머리 2급을 베고, 나머지 빈 배 1척은 모두 협력하여 바다 가운데서 불살랐다. 이처럼 왜인들은 혹은 목이 잘리고 혹은 익사하여 섬멸되었다.

한편 율포해전 승리로 잔뜩 고무된 조선 수군은 가덕 ·천성으로 향했다. 몰운대(沒雲臺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에 이르러 함대를 두 편으로 나누어 협공하며 수색하였으나, 왜적들은 배를 끌고 멀리 도망가고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연합함대는 오후 8시쯤 거제 땅 온천량의 송진포(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로 돌아와서 그날 밤을 지샜다.

6월 8일에도 이순신은 적의 종적을 쫓기 위해 창원 땅 마산포, 안골포, 제포, 웅천 등지로 탐망선을 보내 수색하였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송진포에서 머물렀다.
9일에도 이순신은 이른 아침에 함대를 띄워 웅천 앞 바다에 진을 치고 왜선을 수색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조선수군은 함대를 돌려 당포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6월 10일, 이순신은 미조항 앞바다에서 연합함대를 해산하고 각자의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순신은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며 여러 장수에게 엄하게 말하며 해산하였다.
이처럼 조선 수군은 5월 29일부터 6월10일까지 11일간에 걸친 2차 출전기간 동안 네 번의 해전 즉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에서 왜선 72척을 격침시키고 왜군의 머리도 300여급(전라좌수군 88개, 원균과 이억기 200개 이상) 베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6월 14일에 이순신은 ‘당포해전 등의 전과를 알리는 장계(唐浦破倭兵狀)’를 썼다.

장계에 이순신은 사망하거나 부상한 전라좌수군 명단을 일일이 적었다. 사망자 13명(철환 10명, 화살 2명, 칼 1명), 부상자 34명(철환 13명, 화살 21명)이었다.
부상자에는 사천해전에서 부상한 이순신과 나대용·이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이순신·나대용·이설을 포함하면 37명이었다.

사상자 중에는 당포해전 때 왜군 배에 올라 접전한 사도 1호선 사상자가 가장 많았다. 사망 2명, 부상 8명 도합 1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전체 사상자 50명의 20%였다.
그런데 경상우수군과 전라우수군 사상자 수는 이순신의 장계에 안 나온다.

이어서 1592년 6월 1 일자 ‘선조수정실록’을 살펴보자.
“이순신이 잇따라 왜병을 패배시켰다. 이순신이 본영에서 사량(蛇梁)으로 나아가 진을 쳤는데 당포에서 적선을 만났다. 적장이 큰 군함을 타고 층루에 앉아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이순신이 휘하 병력을 진격시켜 통전(筒箭)으로 집중 사격하게 하니 층루 위의 왜장이 먼저 화살에 맞아 물에 떨어졌는데 마침내 엄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얼마있다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휘하의 수군을 모두 데리고 와서 회동하여 마침내 함께 당항포에 이르러 왜선을 만나 크게 싸웠다.
이때 또 선루(船樓) 위의 적장을 쏘아 죽이고 그 수급(首級)을 취했으며, 왜선 30척을 밀어부쳐 격파하니 적이 대패하여 육지로 올라 도망하였다.
또 영등포에서 싸워 모든 배를 나포하여 섬멸시키니 이로부터 수군의 명성이 크게 떨쳤다. 승리를 아뢰자 이순신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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