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6회] 당항포 해전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6회] 당항포 해전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0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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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5일, 아침 안개가 사방에 끼어 조선연합함대는 늦게 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연합함대가 출전할 무렵 거제에 사는 귀화인(歸化人 일본에서 귀화한 백성) 김모(金毛) 등 7, 8명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당포에서 쫓긴 왜선들이 고성 땅 당항포(고성군 회화면 당항리)에 머물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옛 현충사 사당 (충남 아산 현충사 내)
옛 현충사 사당 (충남 아산 현충사 내)

이에 이순신은 급히 당항포로 이동하였다. 당항포 앞바다에 이르러 진해 쪽을 바라보니 진해성(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 바깥 몇 리쯤 되는 들판에 무장한 군사 1천 명이 깃발을 세우고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은 사람을 보내어 물어본 결과 이들은 함안군수 유숭인이 기병을 거느리고 왜적을 추격하여 이곳까지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항포 바다 어귀의 형세를 물어보니 “거리는 10여 리나 되고 넓어서 배가 들어갈 만하다.” 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먼저 3척을 보내 “포구 내의 지형을 상세히 조사해 오되, 만약 적이 추격해 오면 짐짓 물러나 적을 끌어내도록 하라”고 엄하게 지시하였다. 얼마 있다가 포구내로 들어갔던 전선이 바다 어귀로 되돌아 나오면서 신기전을 쏘아 “빨리 들어오라.”고 알렸다.

이순신은 전선 4척을 바다 어귀에 머물며 복병하도록 지시한 뒤에 노를 재촉하여 포구로 들어갔다. 여러 전선이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 것처럼 줄지어 들어가면서 선수와 선미를 서로 이어 소소강(召所江 고성군 마암면 두호리의 포구이다.) 서쪽 기슭에 이르자 왜선 26척이 기슭에 정박하고 있었다.

조선 함대를 보자 왜군들은 조총을 콩 볶듯이 마구 쏘아 댔다. 이순신은 왜선 4척을 포위 공격토록 하고 거북선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거북선이 천자·지자 총통을 쏘아 적의 대선을 꿰뚫고, 여러 전선이 서로 번갈아 드나들며 총통과 철환을 우레처럼 쏘면서 한참 동안 접전하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왜적이 전세가 불리하면 또다시 배를 버린 채 육지로 올라가면 모조리 섬멸하지 못할 것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적선들을 모두 넓은 바다로 끌어내서 섬멸하고자 유인 작전을 폈다.

조선 함대가 일시 퇴군하여 한쪽을 개방하자, 왜군들은 대장선인 3층 배를 호위하며 모든 배들이 바다로 나왔다. 조금 후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총공격명령을 내렸다.

조선의 전선들은 4면으로 포위하면서 재빠르게 협격을 가하고, 거북선이 왜장이 탄 층각선밑에 접근하여 포를 쏘아 층각선을 깨트리고, 다른 조선 함선들은 불화살을 적선의 비단 장막과 돛에 쏘아 맞혔다.

마침내 대장선의 왜장이 화살에 맞아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왜장이 죽자 다른 왜선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연합함대 수군은 달아나는 왜선들을 포위하여 적을 사살하니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43개이고 왜선은 1대만 빼고 전부 불태웠다. 이순신은 일부러 배 1척만 남겨두고 돌아갈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6월 6일 새벽에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전날 당항포에서 산으로 올라간 적들이 틀림없이 남겨둔 배를 타고 몰래 바다로 나올 것을 예상하고는 바다 어귀로 나가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왜선을 공격하여 왜군 1백여명을 사살하였다.

이 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 구름이 짙게 끼어 바닷길을 분간조차 할 수 없어 이순신은 당항포 앞바다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저녁 무렵에 고성 땅 맛을간장(고성군 동해면 전도리)에서 정박하였다.

한편 당항포 해전과 관련하여 ‘아랑낭자 이야기’와 ‘기생(妓生) 월이 이야기’가 구전(口傳)되어 오고 있다.

‘아랑낭자 이야기’는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본의 간첩이 당항포 해역의 지도를 그리기 위하여 이곳에 왔는데, 주막을 하던 아랑낭자가 한눈에 그를 알아보고 술을 먹여 재운 다음 지도를 조작하여 막힌 바다를 터진 바다로 그렸다. 이 때문에 당항포 싸움에서 왜군이 졌다는 것이다.

‘기생 월이 이야기’는 기생 월이가 무기정(舞妓亭)에서 일본 간첩을 접대하면서 일본첩자의 당항만 지도를 조작하여 왜군이 당항포 전투에서 졌다는 이야기이다. 두 이야기는 사람만 바뀌었을 뿐 비슷하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구전(口傳)에 문학적 상상력을 보탠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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