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가 읽을 무렵
모과가 읽을 무렵
  • 문틈 시인
  • 승인 2022.10.27 11: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파트 동 앞에 모과나무가 한 주 서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모과나무 열매가 두세 개밖에 열리지 않았었는데 올해는 가지마다 휘어질 정도로 열매가 많이 열렸다. 얼추 세어보니 거의 서른 개도 넘는다.

올해 들어 나무가 땅의 새 기운을 받았는지 어땠는지 잔가지마다 열매가 매달려 있는 것이 놀랍고 신기하다. 처음엔 푸른 잎새들에 가려 열매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잎들이 가을물이 들자 낙엽들이 떨어지고 모과열매들이 ‘짠’하고 기적처럼 나타났다.

마치 노란 참외같은 열매들이 둥실둥실 가지마다 달려 있는 모습이 대단한 장관이다. 나는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땅에 떨어진 모과들이 몇 개 있는데 내가 주워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어릴 적 모과향이 생각나서 모과를 집에 두면 온 집안이 향기로 그득해질 것 같았다.

주워온 모과는 그러나 두 개 다 별로 향기가 나지 않았다. 가지에 매달렸던 부분들이 검게 썩어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다른 모과들이 다 가을햇볕에 자랑이라도 하듯 노랗게 익어가는데 이것들만 먼저 떨어진 까닭을 알아차렸다.

비바람과 태풍, 천둥에도 잘 견뎌온 모과 열매가 다 익기도 전에 떨어진 것이 애석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더 버티고 지냈더라면 나무가 떨어져라 명할 때까지 잘 익기를 기다렸다가 툭, 하고 떨어질 것을. 하기사 사람들도 인생을 완주하지 못하고 중간에 세상을 뜨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세상에 한 목숨을 받아 태어나서 풍진세상을 헤치고 살아오다 사고로, 병으로, 혹은 다른 이유로 일찍 죽어간 사람들의 생각이 났다. 한 세상 살기가 쉽지 않다. 모과 열매를 손에 쥐고 향기가 별로 나지 않는다고 타박을 하던 나는 일찍 떨어진 모과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 열매에게 주어진 운이 그밖에 안된 것을 어떡하랴.

이상하게도 나와 친한 친구들은 모두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상을 일찍 떠났다. 나는 가까운 친구 한 사람 없이 외톨이로 고립되어 산다. 나는 세상을 떠난 친구들을 생각할 때마다 인생무상을 느낀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어울려 놀던 시절이 한갓 꿈이었더란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나는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떠나간 친구들을 생각하며 묵념이라도 하듯 잠시 눈을 감는다. 탁상에 놓아둔 모과는 며칠 더 지나면 향기가 나지 않을까, 하고 여러 날을 기다렸으나 모과색깔이 우중중한 잿빛으로 변하면서 바라던 향기는 나지 않는다. 결국 아깝지만 내다 버리고 말았다. 모과는 먹을 수가 없는 이상한 과일이다.

모과는 아무리 보아도 못생겼다. 그러길래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다 시킨다’고 했나보다. 어물전의 꼴뚜기 취급을 받는다. 흔히 모과는 세 번 놀라는 과일이라고 한다. 모과나무 꽃은 참 아름다운데 열매는 못생겼고, 못생겼지만 열매 향기가 좋아서 놀라고, 목질이 많아 맛이 없어 먹을 수가 없어서 놀란다는 것.

그에 비해 한약재로 쓰임새가 많아 한 번 더 놀란다고도 한다. 모과에 대한 칭찬도 있다. ‘탱자는 매끈해도 거지의 손에서 놀고, 모과는 얽고 못생겨도 선비의 손에서 논다’. 칭찬의 말에도 모과가 못생겼다는 말은 역시 빠지지 않는다.

모과는 잘 익은 것은 그냥 방에 놓아두면 방향제가 되고, 설탕에 재어두면 모과차로 마실 수 있고, 술로 담가 마시기도 하고, 가래, 천식, 소화, 간 회복에도 좋고, 그야말로 생김새에 비해 쓰임새가 다양하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모과나무에 모과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것을 보는 즐거움을 으뜸으로 친다. 이렇게 가까이서 매일 모과열매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잔가지에 단단히 매달려 바람에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은 도무지 값으로 칠 수 없다.

전라도 시인 박성룡의 싯귀처럼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果木)의 경이를 느낀다. 황금빛 모과들이 가지마다 매달려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나는 고된 삶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