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 미싱
싱가 미싱
  • 시민의소리
  • 승인 2022.09.22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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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 적에 어머니는 집에서 싱가 미싱을 돌렸다. 시집 갈 때 외조부가 혼수로 사 주신 물건이다. 지금은 사람들의 생활상이 달라져 집에 미싱을 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시절엔 옷을 사 입기보다는 지어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싱가 미싱이 있는 집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

우리 동네는 1백호가 넘는 작지 않은 마을이었지만 큰부잣집 호영이네, 그리고 우리집, 두 집 말고는 미싱을 가진 집이 없었다. 미싱은 값이 꽤 비싼데다 재봉기술이 있어야 해서 사실상 동네에서 미싱을 돌리는 집은 우리집이 유일했다.

큰부잣집은 그 미싱으로 돈을 버는 일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짐작엔 어쩌면 재봉 기술이 딸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옷 주문은 우리집으로 몰려들었다.

어머니는 결혼하기 전에 미싱일을 배운 일이 없었다. 시집 와서 눈대중으로, 시쳇말로 독학으로 재봉일을 익혔다. 음력설, 추석 같은 명절이 가까이 오면 엄다를 비롯하여 해정, 멀리 학다리에서도 옷 주문이 밀려들어 집안은 온통 재단한 천으로 이 방 저 방에 가득했다.

어머니는 손수 디자인을 한 광목천이나 사지 옷감을 둘둘 말아 분필로 ‘학다리 김씨’, ‘신계리 박씨’ 라고 써 놓았다. 설 때는 설빔으로, 추석명절 때, 그리고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새옷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재봉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대단한 기술자로 여겨졌던 것 같다. 가업이 된 미싱 일은 번창하여 나중엔 인근 2개 군에까지 소문이 나 옷감을 들고 왔다. 어머니의 옷짓는 솜씨는 시쳇말로 인간문화재급이었다.

어머니는 못 만드는 옷이 없었다. 학생복, 한복, 마고자, 조끼 등 주문한 옷은 다 만들어냈다. 옷 만들어준 값으로 돈을 들고 온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더러는 쌀, 보리, 밀, 콩, 깨, 조 같은 곡식을 내놓았다.

어머니는 집에서 싱가 미싱을 돌리고 아버지는 대처에 나가 돈을 벌어 논을 늘리고 밭을 샀다. 어머니가 싱가 미싱을 돌리는 덕분에 나는 옷을 짓고 남은 천 조각들로 지은 저고리, 바지, 조끼, 넥타이, 바지를 차려입은 ‘꼬마 신사’ 복장으로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옷을 사 입은 적이 없다. 어머니가 다 지어 주셨다. 6.25동란 후 1960년대 시골은 지지리도 못 살았다. 옆집 병호네처럼 쌀겨 가루나, 소나무 생키로 끼니를 떼울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하게들 살았다.

나도 동무들을 따라 산에 들에 다니며 삐비, 생키를 먹어본 기억이 있다. 그래도 우리집은 어머니의 싱가 미싱 덕분에 더러 이팝에 고기 반찬을 먹고 살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나는 심심하면 싱가 미싱을 돌려보곤 했다. 내게는 일종의 장난감이었다. 미싱 바늘에 실을 꿸 줄도 알게 되었고, 미싱 손잡이를 돌려 천을 박아보기도 했다. 어머니는 이따금 미싱이 뻑뻑해지면 미싱 안에 재봉틀 기름을 몇 방울 치곤 했다.

어머니가 미싱 바늘 끝을 주시하면서 이리 처리 천을 돌려가며 박음질을 하노라면 잘라져 있던 천조각들이 어느새 이리 붙고 저리 이어져 바지, 저고리로 탄생했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가 싱가 미싱에 마법을 건 것처럼 보였다.

사시사철 어머니는 미싱을 돌렸다. 어린 내가 공책에 가가거겨를 쓸 때도, 어머니는 재봉틀을 돌렸다. 겨울밤 늦게까지 어머니는 밀린 옷감을 미싱에 올려놓고 옷을 지었다. 어머니가 두 발로 페달을 디딜 때 들려오는 미싱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어머니는 구순을 넘기고 나서 평생의 반려였던 그 싱가 미싱을 당신의 며느리인 내 아내에게 물려주었다. 몇 해 전까지 내 파자마를 만들었던 미싱, 이제는 녹이 슬대로 슨 싱가 미싱. 그 미싱은 지금 늙으신 어머니의 조각상처럼 내 집에 모셔져 있다. 나는 때로 잠이 아니 오는 밤, 아득히 먼 기억의 저 편에서 들, 들, 들…. 싱가 미싱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환청을 들으며 잠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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