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4회 이순신, 전란에 대비하다. (1)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4회 이순신, 전란에 대비하다. (1)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승인 2022.07.18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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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년 2월에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마자 전란에 대비했다. 그런데 부임한 지 5개월 되는 1591년 7월에 비변사(備邊司)가 “왜는 수전에 강하지만 육지에 오르면 불리할 것이니 육지의 방어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라고 아뢰었다. 선조는 호남·영남에 명하여 성을 증축 · 수비케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1년 7월 1일)

이러한 수군 홀대 정책으로 이순신은 조정에 지원 받기는 어려웠다. 오로지 자력으로 전란에 대비해야 했다. 더구나 1591년 11월에 홍문관 부제학 김성일이 이순신의 발탁은 잘못됐다고 상소하여 이순신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선조수정실록 1591년 11월 1일)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이순신은 군기(軍紀)를 확립하고, 강한 수군을 만들며 전함을 수리하고 화포와 무기를 정비했다. 또한 바다에 쇠사슬을 설치했고, 거북선을 창제했다.

첫째, 군기 확립

이순신은 군기를 엄정히 하였다. 1592년 1월부터 4월까지의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이순신은 군기를 엄정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1592년 1월 1일부터 일기를 썼다)

1월 16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각 고을 관리들과 색리(아전)들이 인사차 왔다. 방답진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에 곤장을 때렸다. 우후(좌수사 보좌관), 가수(假守 임시지휘관)들이 감독을 소홀히 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병선을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알 만하다.

성 밑에 사는 토병(土兵 지역에 오래 산 현지에 밝은 용병) 박몽세는 석수인데 선생원(先生院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의 돌뜨는 곳에 갔다가 동네 개를 잡아먹는 등 민폐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때렸다.

1월 19일

동헌에서 공무를 본 후 각 군대를 점검했다.

3월 6일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동헌에 나가 무기를 점검했다. 활 · 갑옷 ·투구 · 화살통 · 환도 등이 깨지고 훼손되어 쓸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담당 아전과 궁장(弓匠 활 만드는 장인), 감고(監考 물품출납원)등을 처벌하였다.

둘째, 전선과 화포 등 무기 정비

각도의 수군절도사와 첨사, 만호가 거느리는 전선은 각각 4척, 2척, 2척으로 정해졌다. 이 원칙은 5관 5포에도 적용되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본영과 5관 5포에 전선을 철저히 관리하도록 하였다.

활과 화살, 화약과 화포, 창과 칼도 일일이 살펴 병사들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부족한 것은 새로 만들어 채우도록 하였다.

셋째, 수군 훈련

수군 훈련에 관하여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난중일기’에는 활쏘기 기록이 가장 많이 나온다. 활쏘기는 조선 수군의 필수 전투방식이었다. 이순신은 자주 활쏘기를 하였고, 군관들에게도 활쏘기 시합을 시켰다.

1월 12일

본영과 각 진포의 진무(鎭撫 실무책임자)들이 활쏘기 시합을 하였다.

1월 18일

지난 12일의 활쏘기대회 성적 우수자에 대한 장계와 포상자 명단을 봉해 전라감영에 보냈다.

3월 5일

둥헌에 나가 일을 보았다. 군관들은 활을 쏘았다.

4월 6일

진해루(여수시 진남관 아래 누각)로 나가 공무를 본 뒤 군관들을 시켜 활을 쏘게 했다.

한편 이순신은 성밖으로 나가 해운대(여수 동북쪽 마래터널 입구와 여수 신항 사이)에서도 활쏘기를 하였다. 그런데 해운대는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일제때 철도와 신항을 만들면서 이곳을 헐어다가 바다 매립에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넷째, 바다에 철쇄(鐵鎖)를 설치

1497년에 전라좌수사 이량이 돌산도와 장군도 사이에 돌로 수중성을 쌓아 왜구를 막아내려 했던 것처럼,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부두의 동쪽의 소포(여수시 종화동)와 돌산도 사이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철쇄(쇠사슬)을 1592년 3월 말에 설치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1월 11일

이봉수가 선생원에 갔다 오더니 벌써 큰 돌 열일곱 덩어리에 구멍을 뚫었다고 보고하였다.

1월 17일

저녁에 쇠사슬을 박을, 구멍 뚫린 돌을 실어오는데 배 네척을 선생원으로 보냈다. 군관 김효성이 거느리고 갔다.

2월 2일

쇠사슬을 건너 매는데 쓸 크고 작은 돌 80여 개를 실어 왔다.

2월 9일

쇠사슬을 꿸 긴 나무를 베어오도록 이원룡에게 군사를 인솔시켜 새벽에 돌산도로 보냈다.

3월 27일

아침을 일찍 먹은 후 배를 타고 소포에 갔다. 쇠사슬을 가로질러 걸어 매는 것을 감독하여 하루종일 기둥 세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해 보았다.

이순신과 여수 이야기 (여수시 중앙동 이순신 광장)
이순신과 여수 이야기 (여수시 중앙동 이순신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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