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월드컵 축구 사랑 '이유있었네'
여성들의 월드컵 축구 사랑 '이유있었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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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열린 광장으로 나와 응원하며>
<여자라는 이유로 억눌렸던 열정 표출>
<"카타르시스" 만끽>
<"여자 없는 월드컵 변화 없다" 비판도>

여성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남성들이 군대 이야기 하는 것. 그보다 더 듣기 싫은 것은 남성들이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라고 한다. 그만큼 축구는 여성과 거리가 먼 스포츠였다. 하지만 그런 우스갯소리는 옛이야기가 됐다.

월드컵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곳에는 언제나 여성 축구팬들로 가득했다. 4강전이 열리던 지난달 25일 주부 김하영씨(34·서구 상무동)는 "남편은 집에서 TV로 본다길래 딸과 함께 나왔다"며 한국 대표팀이 슛을 날릴 때마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함성을 질렀다.

도청, 상무시민공원, 전남대 후문 등 큰 스크린이 설치된 곳 주변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었다. 어린 아이부터 빨간 옷이 없어 빨간 앞치마를 입고 나왔다는 주부들, 삶은 달걀 사들고 '마실' 나온 할머니까지 집안에 있던 여성들이 모두 거리로 나온 듯 싶었다.

월드컵 기간 내내 여성들의 대화에선 축구 이야기가 떠날 줄 몰랐고 심지어 축구를 모르면 '왕따'를 당할 정도였다. 그동안 '공을 발로 차 골대에 넣는 운동' 정도로만 알던 축구였지만 이제는 '오프사이드' '4·4·2전법' '오버래핑' 등 용어를 구사해가며 즐기는 여성들도 많아졌다.

그런가하면 월드컵 기간에 축구 중계 때문에 연속극 못 본다고 남편에게 불평하는 여성들도 찾기 힘들어졌다. 대형서점 월드컵 코너에도 내용이 어렵지 않은 국제축구연맹(FIFA) 공식 화보집이나 홍명보 선수와 나타다 선수의 편지를 모은 '투게더' 등 축구나 월드컵 관련 서적을 찾는 여성 고객 또한 늘었다.

축구 무관심층이었던 여성들의 축구사랑이 폭발 직전이다. 관심 차원을 넘어 경기장을 쫓아다니며 온몸을 던져 응원하는 열성팬도 부지기수로 늘었다. '붉은 악마'의 여성회원도 올해초 9만명 중 3만1천명이었으나 최근에는 12만명 중 4만5천명으로 여성 증가율(45%)이 남성(27%)을 압도했다.
남자들의 잔치, 월드컵 축구에 회오리처럼 강한 여풍이 불었다. 이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전남대학원 제갈춘기(신문방송학 전공)씨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폭력성이나 승부욕 앞에 억눌렀던 감정들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 같다"고 분석한다. "굳이 비싼 표 사들고 경기장을 찾지 않아도 함께 어울리고 마음껏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성적인 여성들을 움직였다"며 "이 자체가 축제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열기가 축구에 대한 열정이나 이해를 높인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경기 규칙이나 전문용어를 알지 못해도 함께 즐거워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용한 여성을 끌어들인 것이다"는 것. 때문에 축제는 잠시 뿐, 월드컵이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전남대 여성연구소 강현아 연구원은 "이번 월드컵에서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밖으로 나왔다는 것보다 스포츠에서도 성차별이 사라져야 한다는 인식 확산이다"고 강조한다.

월드컵 어디에도 여자들은 없었다. 히딩크도 펠레도 블라터도 정몽준도 차범근도 신문선도 베컴도 안정환도 오언도 박지성도 차두리도 황선홍, 홍명보도 모두 남자다.
이에 강씨는 "함께 밖으로 나와 응원을 같이 했다고 남녀차별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며 "몸에 달라붙는 여성운동복 등 성상품화 인식부터 바뀌어야 진정한 성평등이 이뤄질 수 있다"고 밝혔다.

결국 2002 한·일 월드컵이 한국에게 좋은 경험을 선물한 것이다. "남성들이 축구만 하면 열광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박수진씨의 이야기처럼 여성들은 어디서나 남녀를 따로 규정하지 않는 사회를 원하고 있다. 이는 "눈치 보지 않고 내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는 공간 마련"에 대한 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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