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내린 비
간밤에 내린 비
  • 문틈 시인
  • 승인 2022.06.1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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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기상하고 나서야 어젯밤에 비가 내렸다는 것을 알았다. 거실 창유리 앞을 가로지르는 철제 난간에 빗방울이 수정처럼 줄지어 매달려 있다. 하늘을 배경으로 숲은 비에 젖어 녹색이 한층 더 짙푸르게 생기를 띠고 있다.

땅바닥도 빗물을 잔뜩 머금어 촉촉해 보인다. 만물이 오랜 갈증을 해소한 티가 역력하다. 밤에, 나도 모르게 비가 내리다니, 마치 반가운 비가 내리는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은 미묘한 감정.

아파트 6층에 살다 보니 이렇게 비가 온 다음에야 어, 간밤에 비가 왔나봐, 이런 식으로 비가 왔음을 확인한다. 이것이 나는 좀 서운하다.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더라면, 볼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릴 적 시골에 살 때는 마당에 가득 밤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기도 하고, 낮에 비가 올 때는 장판방을 굴러다니며 어머니가 볶아 주신 콩을 집어 먹기도 했다.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릴 때 물큰 코를 후비는 흙냄새. 그 흙냄새가 참 좋았다.

포장도로, 시멘트로 덮여 있는 도시에서는 비가 와도 흙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 비가 올 때 훅 끼쳐오는 흙냄새를 맡으면 내가 진정코 살아 있음을 느꼈다.

사실 내가 비가 오기를 고대한 것은 물오리떼가 생각나서다. 얼마 전에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멀리 산천 구경을 나갔는데 그 마을 사람들은 강이라고 불렀으나 강이라기에는 물이 너무 없어 개천이라고 불러야 좋을 둑길을 거닐었다.

개천에는 물오리 한 마리가 부화한 지 얼마 안되는 열 마리쯤 되어 보이는 새끼 물오리들을 데리고 떠돌고 있었다. 바닥이 거의 드러나 보이는 개천의 물웅덩이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물오리떼를 보면서 만약에 비가 오지 않고 개천 바닥에 물이 다 말라버리면 어떡하나 은근히 걱정을 하던 터였다.

아마 어미 오리도 무척 걱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개천 바닥이 완전히 드러나면 물오리들은 오갈 곳이 없어진다. 뱀이나 매가 눈독을 들이고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그러기 전에 굶어 죽을 수도 있고. 그 후로 날마다 비 소식을 기다리며 물오리떼가 눈에 밟혀서 애를 태우고 있었다.

비가 안 오면… 사람들이 가까운 산봉우리에 올라가 기우제라도 올려야 하지 않을까싶은. 그런데 자연이란 참 신묘해서 때가 되면 비를 뿌린다. 다만 너무 늦거나 빠를 때가 있긴 하지만 비가 와야 할 때는 비가 온다.

이렇게 밤으로 비가 올 때는 아침 일찍 아버지는 삽을 들고 무논으로 가셨다. 논의 물꼬를 터주고 가장자리의 둑을 다독이기 위해서다. 모를 심은 지 얼마 안된 논은 물이 찰랑찰랑하니 보기 좋았다. 어린 벼들이 물을 들이키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대기의 아래쪽과 윗쪽의 기온 차가 40도쯤 벌어지면 비가 온다고 한다. 아래의 더운 공기와 위의 찬 공기가 부딪쳐서 구름이 모여 비를 뿌린다는 것이다. 과학적 원리까지는 모르지만 산천에 비가 내린 풍경은 그윽하고 푸근하다.

하늘의 기운이 대지를 감싸안는 듯하다. 이 지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장면이다. 이렇게 사람의 때를 맞춰서 비가 내려 주다니 감사한 일이다. 하늘과 땅의 대공사에 인간이 끼어들어 살 궁리를 하는 모습이 천상 인간은 대지의 자녀들이다.

마치 개천의 물오리떼가 비를 기다리듯, 그래서 물오리 가족이 살아가듯이. 비가 온 다음날은 하릴없이 집 앞의 숲에 모여 있는 나무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불러주고 싶다. 내 이름은 맨 나중에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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