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따라’ 자처한 국민MC 송해 95세로 별세
‘딴따라’ 자처한 국민MC 송해 95세로 별세
  • 박병모 기자
  • 승인 2022.06.08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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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세 평생 ‘딴따라’를 자처하면서 ‘전국노래자랑’을 34년간 진행하며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 했던 국민MC 송해씨가 95세로 별세했다.

KBS 전국노래자랑의 '영원한 MC'로 사랑받았던 송해씨.
KBS 전국노래자랑의 '영원한 MC'로 사랑받았던 송해씨.

악극단 시절부터 한류 열풍까지 한국 대중문화의 변천사를 온몸으로 통과한 예술인 이였기에 그의 죽음은 국민을 슬픔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고인은 1927년 4월27일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토현리에서 송제근과 박신자의 7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송복희. 재령군으로 옮긴 것은 고인이 초등학교 다닐 때다.
그가 전쟁통에 징집을 피해 고향을 떠났을 땐 가족 중 어머니와 8~9세 연상의 형님, 7~8세 연하의 여동생만 생존해 있었다.

송해라는 이름은 연평도에서 구사일생 탑승한 유엔군 상륙선에서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황해도 재령. 그리운 어머니를 두고 떠나온 곳. 1950년 발발한 6‧25 전쟁 와중에 혈혈단신 남하할 땐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이번에는 조심하거라” 하며 눈물짓던 어머니와 툇마루에 앉은 여동생이 23세 청년 송해 뇌리에 남은 마지막 모습이다. 그렇게 시작된 유랑 길이 평생 그를 서민의 벗, 무대 위의 ‘광대’로 이끌었다.

직업적 예인의 시작은 창공악극단이다. 1951년 창립된 창공악극단에 28세이던 55년 무작정 찾아가 입단했다. 악극 공연과 함께 노래‧댄스 등으로 구성된 버라이어티쇼를 공개 무대에서 펼치면서 사회자(MC)로서 감을 익혔다.

1960년대 초반 대중문화의 중심이 극장무대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으로 급격히 선회할 즈음 자신도 방송계로 발길을 옮겼다. 악극단 시절 재치 있는 만담을 눈여겨본 방송계 인사들 덕이었다.

데뷔무대는 동아방송의 ‘스무 고개’. 라디오 최고 인기 퀴즈프로그램으로 고인은 코미디언 박시명과 콤비를 이뤄 퀴즈쇼 막간 콩트를 했다. 1964년쯤 송해는 구봉서‧배삼룡‧박시명 등과 함께 MBC와 월 약 2만원에 전속 계약을 했는데 당시로선 파격 대우다. ‘웃으면 복이 와요’ 등 코미디 프로를 통해 희극인 끼를 과시했다.

잘 나가던 그가 전국구 스타 반열에 오른 것은 1974년 시작한 KBS 라디오 ‘가로수를 누비며’를 통해서다.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모든 이들을 격의 없이 대하는 그의 인품이 제대로 발현된 무대가 88년 맡은 ‘전국노래자랑’이다. 난생 처음 TV에 나오는 출연자들이 고인의 주름진 웃음과 구성진 말솜씨에 끌려 갖은 끼를 풀어놓았다. 때로 정겹고 때로 우스꽝스럽고, 자주 가슴 찡한 대화가 오갔다. 고인은 이들이 챙겨온 음식을 나눠먹고 노래와 춤을 어울려 췄다. 반주를 맡은 악단장이나 카메라 감독까지 무대로 끌어들이는 것도 예사였다.

리얼 버라이어티란 장르가 굳혀지기 전부터 고인은 무대 안팎을 넘나들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가감없이 전달했다.
악극단 출신인 고인은 앨범을 여러 장 낸 가수이기도 하다. 1987년 ‘백마야 우지 마라’ ‘아주까리 등불’ ‘애수의 소야곡’ 등 1세대 가요를 모아 ‘송해 옛노래 1집’이라는 타이틀로 첫 음반을 냈다.

84세인 2011년 ‘나팔꽃 인생 60년- 송해 빅쇼’라는 투어 공연도 벌였다. 2013년까지 햇수로 3년 간 전국 18개 지역에서 총 42회 공연의 거의 전석이 매진됐다. 2015년 초엔 8집 싱글앨범 ‘유랑 청춘’을 통해 신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해 세종문화회관에서 ‘희극인 첫 공연’이라는 이정표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누가 뭐래도 방송인 송해와 한몸인 프로가 ‘전국노래자랑’이다. 1980년 11월 첫 전파를 탄 ‘전국노래자랑’ 마이크를 그가 넘겨받은 것은 61세였던 88년. 그는 2년 전 교통사고로 스무살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를 공개무대 현장으로 끌어들인 이가 배우 안성기의 친형이기도 한 안인기 KBS PD다. 고인은 PD 출신이자 영화제작자였던 그의 부친과 오랜 마작 친구 사이였다.
88년 5월 경상북도 성주 편을 시작으로 91년 몸이 좋지 않아 6개월 쉰 것과 말년을 제외하곤 녹화에 불참한 적이 없다.

그러다 2019년 말 폐렴으로 입원한 데 이어 지난 9월 중순 7㎏이 빠진 해쓱한 모습을 보이면서 건강 우려를 샀다. 올 3월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기도 했다.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열어보고 싶다 했던 소원도 분단 76년의 한과 함께 스러졌다.

고인은 평생 '딴따라'를 자처했고 대중문화예술인이란 데 자부심을 가졌다. 2003년 김대중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 받았을 때 수상소감이 “나는 딴따라다. 영원히 딴따라의 길을 가겠다”였다.

2015년 은관문화훈장 수상 땐 “대한민국 대중문화 만세!”라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했다.
60여년을 해로한 부인 석옥이 여사를 2018년 1월 지병으로 먼저 보냈다. 유족으로 두 딸과 손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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