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77) - 전운(戰雲)이 감도는 한반도
조선, 부패로 망하다 (77) - 전운(戰雲)이 감도는 한반도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2.05.30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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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레야 1903년 가을』

을사늑약 전후 세계정세 (덕수궁 중명전 내)
을사늑약 전후 세계정세 (덕수궁 중명전 내)

1903년 가을부터 대한제국은 흉흉한 소문에 휩싸였다. 동학교도들이 일본인을 내쫒기 위해 다시 봉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시기에 폴란드계 러시아인 세로체프스키(1858∽1945)는 1903년 10월 10일에 부산에 도착하여 1개월간 한국을 여행하고, 1905년에 『코레야 1903년 가을』 책을 지었다.

『코레야 1903년 가을』의 마지막은 ‘전쟁 전야의 서울’이다. 저자는 러일전쟁 전야의 대한제국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신문균과 나는 서울의 유명 음식점에서 마지막 저녁을 함께 보냈다. 음식점은 너무 형편없었다. 역겨운 술 냄새가 진동했고, 탁자도 의자도 벽도 너무 더럽고 지저분했다. 신문균은 말이 없었다. 벽 너머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손님들이 나간 후에야 그는 우울한 말을 하였다.

‘도대체 희망이 보이지 않아요. 교육도 하고 학교도 열고 학생들 유학도 보내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돈이 없는 것은 관료들이 도둑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이들도 가족을 봉양해야 하고, 친척도 도와주어야 하고, 뇌물도 상납해야 하고 ... 그러니 도둑질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에 관료들이 너무 많다고 하지만, 한국에는 관직을 제외한 직업이란 게 없습니다. 농민들은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고 있어 차라리 개들이 더 낫게 사는 지경입니다.’

그는 한숨만 푹 쉬며 술을 들이켰다.

‘그럼 일본인들은 어떻습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본인들이요? 그들은 최악입니다. 그들은 산 채로 우리 목에 올가미를 걸고 있어요. 그들은 은행을 열어서 우리에게 돈을 빌려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들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서울 땅의 1/3이 그들 소유라는 것을 아십니까? 다들 그들에게 저당 잡히고 또 잡히고 있지요.’

‘그래도 일본인들은 개혁을 시도하고 있지 않나요? 사람들을 교육하고 노예제를 폐지하고 국가 경제를 정비하고자 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겉으로만 우리를 만족시키려 하고 있어요. 우리의 겉모습만 바꾸고 내면은 다 파내 버려 껍질만 남기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혼을 없애려고 합니다.’

신문균은 우울한 침묵 속에 연거푸 술을 마셨다. 잠시 후 우리는 발코니로 나갔다. (...) 갑자기 저기 나무들 사이로 갓 쓴 노인의 환영(幻影)이 보이는 듯했다. 노인은 졸음이 밀려오는 지친 머리를 기댈 곳을 헛되이 찾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이야말로 한국의 저 불행한 과거를 말해주는 끔찍한 상징이 아니겠는가!” (세로셰프스키 지음· 김진영 외 4명 옮김, 코레야 1903년 가을, 개마고원, 2006, p 420-423)

# 1903년 12월에 러일 양국은 경쟁적으로 한반도에 병력을 증파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2월 17일에 순양함 두 척을 제물포로 보냈다. 일본군은 부산 · 인천 등을 통해 수십 명 단위로 상륙했고, 연습용 명목으로 기관포와 공병 재료들도 소속 들어왔다.

1904년 들어 열강들은 자국 공사관 보호를 명목으로 속속 호위병을 입경시키고 순양함을 제물포에 파견했다. 1월 3일 미국 공사 알렌은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위해 미국 해병대 100명을 입경시켰고,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도 호위병을 증강했다. 러시아는 1903년 12월 17일에 순양함 두 척을 제물포로 보냈다.

이러자 서울의 물가는 폭등하고 민심이 동요되는 등 극도의 혼란이 일어났다. 1월 25일자 <황성신문>은 “근일 각국의 보호병이 서울에 들어오고 일본과 러시아의 개전론이 유포되면서 곡식값이 뛰고 있다.”고 보도했다.

1904년 1월 2일에 고종은 고위 대신을 통하여 미국공사관에 파천을 요청했다. 알렌은 “전쟁이 터지면 황제가 공사관으로 오겠다는 요구를 거절했다.”고 미국 국무부에 보고했다.

프랑스공사관에 온돌방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고종은 프랑스 공사관에도 파천을 타진했지만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고종은 외국 공관으로 도망갈 궁리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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