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74) - 서경 공사로 평안도 백성이 도탄에 빠지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74) - 서경 공사로 평안도 백성이 도탄에 빠지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2.05.09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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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6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일본 육군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러시아에 ‘39도 한반도 분할론’을 제안했다. 당시는 고종이 아관파천 중이라 러시아는 이를 무시했다.

덕수궁 석조전
덕수궁 석조전

그런데 1901년 1월 7일 주일러시아 공사 이즈볼스키가 열강의 공동 보증하에 한반도 분할론을 일본 정부에 제안했다. 소식을 접한 고종은 비상이 걸렸다.

1902년 5월 1일에 특진관 김규홍이 두 개의 수도에 대하여 건의했다. 즉 서경(西京 평양)에 이궁(離宮)을 새로 짓자고 상소한 것이다.

(이는 한반도가 분할될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5월 14일에 고종은 서경 공사를 명하면서 특별히 내탕전(內帑錢) 50만 냥(10만 원)을 내려보냈다. 그러면서 해당 도지사로 하여금 재정을 마련하여 공사를 끝내도록 하였다. 서경 공사비는 216만 원이 들었는데 고종이 하사한 내탕금 10만 원을 제외한 208만 원은 모두 평안도 백성들이 부담했다. 평안도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6월 3일에 서경 행궁(行宮)인 풍경궁(豊慶宮) 공사가 시작되어 1903년 11월 6일에 태극전과 중화전 공사가 완공되었다.

이리하여 고종과 황태자의 어진이 모시어졌다. 그런데 추가 공사는 재정난 때문에 난관에 봉착했다. 더구나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평양은 어수선했고 공사는 중단되었다.

1904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 안종덕이 상소하여 서경 공사의 문제점을 아뢰었다.

“서경(西京)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한 도(道)의 민력이 먼저 고갈되었다고 합니다. 대개 이 공사는 보잘것없는 간사한 자들이 원칙에서 어긋나는 망령된 설을 조작해 폐하를 속이고 그에 빙자하여 백성들을 착취하려는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

지금 러일전쟁을 하고 있는데 서경은 공교롭게도 그 요충에 있으니 장차 화가 미칠지 모릅니다. 신은 진전을 속히 도로 모셔 오도록 하소서.

궁전 공사는 영영 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서도(西道)의 백성들이 소생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 대체로 토목 공사를 벌이는 것은 검소한 것을 숭상하지 않는 데 관련되어 있습니다. 검소하지 않으면 청렴해지지 못합니다. 이처럼 재력이 궁핍한 때에 기근까지 닥치고 전쟁까지 덮친 마당에 백성들을 부리는 것이야말로 폐하의 청렴한 덕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폐하께서는 살피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7월 25일에는 봉상사 부제조 송규헌이 상소를 올려 서경 공사 책임자 민영철을 탄핵했다.

“민영철이 지난날 평안도에 감히 요궤(妖詭)하는 무리들을 이끌고 허황된 말로 부추기고 현혹시켜 폐하를 기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힘으로 눌러 복종시키려면 서경에 창건해야 한다고 하여 대거로 궁궐 역사(役事)를 일으켜서 매향전(賣鄕錢)을 집집마다 거두고 재목 운반 비용을 각 촌리(村里)에 배분하여 거두어들였으니 이는 백성이 어육(魚肉)이 된 것으로 마침내 전 지역이 소란해졌습니다. 그는 수많은 재물을 축적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는 국경을 넘어 몸을 빼서 도주하고는 스스로 다행으로 여겼으니 속히 자세히 조사하여 정죄(正罪)함이 마땅합니다.”

이러자 1905년 2월 17일에 민영철이 공사 비용의 지출과 잔고를 기록하여 상소를 올렸다.

"궁궐 공사를 감독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내탕(內帑)을 내려주신 것 외에 양 도의 향록(鄕錄)은 이미 내린 명령이 있은 것이고 여러 고을에서 자원하여 도운 것도 나라를 받들자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 지출과 잔고를 기록한 책을 낱낱이 구별하여 올려서 폐하가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속히 신의 서경 감동당상(西京監董堂上) 직책을 체차(遞差)시키고, 직무를 잘못 수행한 신의 죄를 다스려 주소서."

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마침 어려운 시기를 만나 공사를 아직 끝내지 못하였는데 일의 형세가 본디 그럴 수밖에 없어서 재정문제로 말하면 수입과 지출이 더할 나위 없이 자세하니 혹 허튼 비방이 있다고 해도 개의할 것이 무엇인가? 소청이 이러하니 감동(監董) 직책은 아뢴 대로 하고 끝내지 못한 공사는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끝내지 못한 공사는 결국 무산되었다. 1908년에는 봉안된 어진이 다시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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