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꽃의 나라
작은 꽃의 나라
  • 문틈 시인
  • 승인 2022.05.04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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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계단 틈에 이끼처럼 풀이 돋아나더니 어느새 그 풀 대궁이 끝에 좁쌀 만한 하얀 꽃이 피어 났다. 나는 돌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작은 꽃을 바라본다. 어쩌다 하필 계단과 계단이 맞물린 돌 틈에 이 작은 꽃은 피어났을까. 길가의 풀밭, 언덕, 숲, 개천가 같은 더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이런 구석지고 그늘진, 사람의 발길이 잦은 돌 틈새에 피어났을까.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꽃, 차마 꽃이라고 이름을 불러주기에도 뭣할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한 꽃. 나는 무슨 오래된 비밀을 발견한 사람처럼 한참 그대로 앉아 작은 꽃에 말이라도 걸듯이 바라보았다.

돌 틈에 핀 작은 꽃도 하늘과 땅이 합작하여 만든 한 생명이리라. 한때의 절정이 있으리라. 그 누구도 모르는 외진 곳에 없는 듯이 피어났지만 한 생을 빛내리라. 나는 연약하고 볼 품 없고 눈에 뜨이지 않는 이 작은 꽃이 화창한 봄날 무슨 까닭으로 피어 있는 것 같아서 짠하게 보였다.

어쩐지 내 모습인 양하여 SNS에서 이웃을 신청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꽃의 친구가 되기로 했다. 내가 작은 꽃의 첫 번째 친구로 등록되기를 바라면서. 그리고는 산책을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으레 계단참에 멈춰서 늘 작은 꽃의 안부를 물었다. 어느 때는 바람에 흔들리고, 어느 때는 햇살을 받아 생생한 기운을 뿜어대더니 오늘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그 자리에 있다.

흙부스러기도 뵈지 않는 돌 틈에서 뿌리가 흙을 움켜쥐며 내뻗는 것이 오죽이나 힘들었을까. 옴짝달싹 못한 채 온몸이 갇혀 있단 느낌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지만 나는 꽃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 하늘과 땅이 하는 공사에 내가 어찌 손을 대랴 싶다.

조심스레 코를 들이밀고 애써 작은 꽃이 뿜어대는 실낱같은 향기를 맡아본다. 성냥불이 꺼지고 타버린 뒤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기 같은 것이라도 나나 하고. 향기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 꽃이 워낙 작으니 향기를 품고 있어도 뿜어낼 힘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돌 틈의 구석지고 그늘진 이런 돌 틈새에 피어난 작은 꽃 한 송이를 찾는 벌 나비는 있을 것 같지 않다. 어쩌다 길을 잘 못 든 작은 개미들만이 지나가다가 서둘러 되돌아갈 뿐이다. 그저 오직 바람만이 이따금 작은 꽃을 흔들어주고 갈 뿐. 바람이 꽃을 흔들고 지날 때마다 꽃은 살아 있다고 말하려는 양 온몸을 움직인다.

좁쌀알 만한 꽃이어도 한 생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내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전우주적인 뜻이 있다고 믿는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세상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원리를 받아들이고 믿게 되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름도 모르는 이 작은 꽃은 작다고 해서 그것이 살아야 할 뜻이 작은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을 계속 쫓아가다 보면 결국 내게로까지 연결된다.

어제는 비가 흩뿌렸는데 그 비마저도 이 돌 틈의 작은 꽃자리에는 스며들지 않았다. 나의 친구가 된 꽃이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물잔에 물을 받아가지고 가서 작은 꽃이 피어난 돌 틈에 손가락으로 몇 방울 물을 떨어뜨려 주었다. 자칫 물잔을 다 부으면 홍수를 만나 뿌리가 뽑혀 쓸려 갈 것만 같다.

내가 돌 틈의 작은 꽃의 친구가 되기로 했지만 나 말고는 이 꽃의 친구가 될 그 무엇도 없다. 오직 홀로 피어 있을 뿐 곁에 다른 꽃도 없다. 꽃들은 대개 무리지어서 핀다. 클로바, 꽃잔디, 민들레, 패랭이…. 다들 군락을 이루어 피어 있다. 어쩌다 이 작은 꽃은 홀로 돌 틈에 외로이 피어나게 되었을까.

대대로 이 돌 틈에 자리잡고 핀 것은 아닐 것이다. 바람에 휩쓸려 꽃씨가 우연히 이 곳에 날아든 것이리라. 우연히 …. 나는 돌 틈에 핀 작은 꽃에게 약속을 해주었다. 내가 친구로서 널 기억해 주겠노라고. 내가 널 사랑해 주겠노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보건대 이 꽃은 이제 외롭지 않을 것이다.

설령 돌 틈에 피었다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시들어 사라진다 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피어나 자기를 사랑하는 소중한 친구를 두었으니. 신비주의자였던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의 공간을 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의 시간을 붙잡는다.’(‘순수의 전조’ 일부)라고 노래했다.

나는 정말 모른다. 왜 꽃들은 피었다가 지는 것인지. 그러나 나는 안다. 모든 생명들은 돌 틈에 핀 작은 꽃 한 송이조차도 마땅히 사랑 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라고. 이 작은 꽃에도 꽃씨가 맺을까? 올 봄에 나는 한 송이 꽃이 보여준 삶아야 할 이유에 감격한다. 하나의 풀꽃에 바치는 내 사랑이 참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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