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72) - 의정부 의정(총리) 윤용선의 상소
조선, 부패로 망하다 (72) - 의정부 의정(총리) 윤용선의 상소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2.04.25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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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3월 12일에 의정부 의정(총리) 윤용선이 상소를 올렸다.

홍릉(고종과 명성황후의 능, 경기도 남양주시 소재)
홍릉(고종과 명성황후의 능, 경기도 남양주시 소재)

윤용선은 1899년 8월 17일에 반포된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를 만든 법규교정소 총재였다.

전문 9조로 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대한제국은 전제국가이고, 황제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가지며, 육해군의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관리임면권, 조약 체결권 등 주요 권한을 모두 황제에게 집중시켰다. 더 나아가 “황제의 권한을 손상시키는 자는 신민(臣民)의 도리를 잃은 자”로 규정하여 백성에게 복종만 강요했다.

그러면 윤용선의 상소를 읽어보자.

"첫째, 궁금(宮禁)을 엄숙하게 할 것입니다. 근래에 기강이 무너져 공적인 일을 빙자해서 사적인 것을 도모하여 폐단이 너무 많으므로 매우 통탄스러워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종친과 외척은 모두 촌수(寸數)를 한정하였고, 학식있고 단아한 선비라도 특별히 부르는 일이 없으면 알현할 수 없는 것이 조종조(祖宗朝)의 옛 규례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애당초 자격이 없는 조신(朝臣)들과 사방의 부잡(浮雜)한 무리들이 연줄을 타고 궁궐에 출입하여도 거의 막지 않으니, 기밀이 누설되고 위엄이 농락당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관리와 액속(掖屬)들을 엄히 금하고 살펴서 비록 각부 관리라도 공적인 부름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궁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종친과 외척도 들어오라는 명이 있어야 들이는 옛 법을 거듭 밝히소서. 만약 이를 위반하는 자는 의정부가 처리하도록 해주소서.

둘째, 잡세(雜稅)를 없애고 관리를 파견하는 것도 없애소서. 갑오년(1894년) 이후 누차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아직까지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요역(徭役)과 세금을 가볍게 매기어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세금을 다방면으로 걷어 들이고 명목도 한 두가지가 아니며 사방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온갖 침학(侵虐)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속히 칙령을 내리셔서 모두 폐지하게 하소서. 만일 경비가 궁색하여 잡세로 보충하려고 하면 그 권한을 전적으로 탁지부(度支部)에 주어 탁지부가 덜 것은 덜고 징수할 것은 징수하게 하여 그 징수한 재물을 마땅히 써야 될 비용에 이획(移劃)한다면 백성을 착취하거나 중간에서 착복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독쇄관(督刷官), 위원(委員), 파원(派員) 등 허다한 관원은 폐단 위에 폐단만 더하게 되니 모두 없애버려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소서."

(고종실록 1900년 3월 12일)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윤용선의 상소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이 당시에 별입시(別入侍)의 명목이 날로 늘어나 청별입시(廳別入侍), 계별입시(階別入侍), 지별입시(地別入侍) 등이 있었다. 청별입시는 청(廳)에 오르는 자요, 계별입시는 뜨락에 나열해 있는 자, 지별입시란 마당에 서 있는 자이다. 위로는 대관으로부터 아래로는 무당과 백정, 거간꾼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고종은 그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고 그들이 알현할 때마다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에 입시한 사람들은 고종이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회를 노려 알현하곤 하였다. 어느 곳에는 광산이 난다, 어느 곳에는 수리(水利)가 있다, 어떤 회사를 세워야 한다고 하면 고종은 곧바로 허락했다.

그러나 평안도는 백성들이 사나워서 파견된 관원들이 누차 쫓겨나거나 구타를 당하였으므로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오직 영남과 호남지방이 화를 당하여 백성의 원성이 날로 드높았다. 이때 윤용선은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억지로 이런 상소를 하였다.”

윤용선이 상소하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궁금이 문란한 것은 과연 한탄스럽다. 무릇 종친과 외척, 조신들의 출입하는 규정은 궁내부로 하여금 옛 법을 거듭 밝혀 시행하게 하라. 독쇄관 같은 관리를 없애버리는 것은 더없이 급한 일이다."

하지만 무당과 백정, 거간꾼에 이르기까지 궁궐에 출입하는 것은 전혀 시정되지 않았다. 워낙 돈을 좋아한 고종은 전혀 부패 척결에 나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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