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
거울 앞에서
  • 문틈 시인
  • 승인 2022.04.1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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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날마다 거울을 보고 산다. 날마다 보는 거울 가운데 하나가 화장실 거울이다. 화장실의 앞 쪽 벽면은 반이 거울로 되어 있다. 거울 왼 쪽 끝을 가로로 열면 거울이 밀려나가고 뒤에 수납장이 나온다. 거울에 뒤가 있다는 것이 매번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거기에 수건, 비누 같은 것을 넣어 둔다.

어릴 적 어머니의 화장대에 있는 거울을 보고 나는 거울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거울 속에 비친 풍경 속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세상이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 날 우연히 벽면과 거울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을 발견하고 뒷면을 더듬게 되었다.

거울 뒤는, 허무하게도, 붉은 칠이 칠해져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거울 뒷면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그때의 실망감, 상실감, 뭐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여 꽤 오랜 동안 거울의 뒷면이 준 허망함을 안고 살았다.

거울 속의 세상으로 가보고 싶은 어린 마음을 무참히 흐트러뜨린 거울 뒷면에 대해 나는 아직도 유감을 가지고 있다. 딱히 그것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이 생전 거울을 잘 보지 않고 살아왔다. 모르긴 하지만 아마 직장생활을 할 적엔 더러 거울을 보고 머리칼에 물을 묻히기도 하고 했을 것이다.

거울을 거의 안보고 지낸 지 무척이나 오래된 것 같다.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는 내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화장실에 매일 들락날락하는데 전혀 거울을 보지 않을 리는 없다. 내 말인즉슨 본다 해도 그저 건성으로 볼 뿐이라는 말이고, 보아도 거울을 의식하고 본 적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나는 무심코 거울을 정면으로 응시하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울 속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거울 속의 아버지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거울 속에 비친 사람은 바로 지금 내 나이만 했을 때의 아버지의 얼굴을 영락없이 빼닮은 내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착각할 정도로 순간 내 얼굴이 아버지처럼 보였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어언 9년. 그동안 나는 제사를 지내는 명절, 기일에나 아버지를 마음에 새길 뿐 보통 때는 잊고 살아왔다.

돌아가셨다고,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고, 아주 영 잊어버린 사람처럼 대하고 지내온 것 같아서 죄스럽고 불효막심을 자책했다.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영 안계신 건가. 잊어먹고 살아도 괜찮은 건가. 내가 아버지를 기억하고 사모하지 않는다면 저 세상의 아버지는 나를 얼마나 서운해 하실까.

어느 나라 시인의 시였던가? ‘네 집 식구는 몇이냐?/넷이요. 아빠, 엄마, 나/그리고 집 뒤에 묻힌 오빠.’ 그런 시가 떠오른다. 죽은 오빠를 살아 있는 가족에 포함시켜 말하는 마음. 내가 거울을 보고 순간적으로 아버지로 착각한 내 모습을 바라보고 문득 아버지를 사모함이 곧 나를 사랑함임을 깨달았다.

나는 나이 들어갈수록 더욱 더 아버지의 초상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아버지를 잊는 것은 나를 잊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거울 뒤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서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어릴 적의 꿈은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 얇은 거울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내가 거울 속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낸다.

들어가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고 싶다. 아버지를 귀히 모시는 것은 나를 귀히 여기는 것이다. 거울 사건 이후로 나는 아버지를 잊지 않고 지내려고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거실 벽에 걸어 두고 있다. 평생 나를 낳아 주신 아버지를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여민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보며 못내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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