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산수유
반갑다, 산수유
  • 문틈 시인
  • 승인 2022.04.05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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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부모님을 뵈러 갈 적엔 나는 늘 어머니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곤 했다. 학교 다닐 적에도, 직장 생활할 때도, 가정을 꾸린 후에도 부모님을 뵈러 갈 때 늘 그랬다. 미리 몇 일에 뵈러간다는 연락도 하지 않고 마치 순간 이동한 사람처럼 나타난다.

“어머니!” 하고 천 리 밖에 사는 내가 갑자기 어머니 앞에 나타나면 어머니는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는 “오매, 너 왔냐?” 하시며 갑자기 나타난 아들을 보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반가워하신다. 마치 이 장면이 꿈이냐, 생시냐 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밥을 짓다가도, 빨래를 하다가도, 머리에 맨 흰 수건을 풀면서 내 손을 그러쥐고 “뭔 일이냐?”하고 기뻐하신다. “어머니 뵈러 왔어요.” 어머니가 깜짝 놀라시는 표정에 나는 더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산수유가 꼭 그렇다. 봄이 오면 가장 먼저 피는 꽃이 산수유다. 그런데 산수유는 이 노란 보풀 같은 작은 꽃들을 보석처럼 빛을 흩뿌리며 마른 나뭇가지에 줄줄이 단 채 조용히 서 있다. 산수유가 핀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나는 오랜만에 지난주 산책길을 나갔는데 산수유꽃이 피어있는 것을 문득 목격했다.

봄에 피는 다른 꽃들, 목련, 매화, 벚꽃 같은 것들은 “내가 피었다!”고 제가끔 소리를 지르고 야단법석을 떨면서 핀다. 산수유는 아무 말 없이 홀연히 피어 있었다. 풀밭의 작은 꽃들조차도 “나 여기 피어 있어요” 하는 듯 존재감을 드러내며 피어 있다.

그러나 산수유는 아주 조용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렇게 뜬금없이 곁에 피어 있다. 없는 듯이, 있는 듯이, 도를 깨친 말없는 선승 같은 표정이다. 지난주 산책길에서 나는 산수유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반가워서 한참을 산수유나무 곁에 서 있었다.

“오매, 너 피었냐?” 나는 더 이상 무어라 말을 못하고 그렇게 오래 서 있었다. 나를 반겨주던 어머니의 마음이 혹 이랬을까 싶다. 순간 나는 산수유가 나하고 혈연관계라도 되는 것 같은 친근감을 느꼈다. 안아주고 싶었다. 어머니가 나를 안아주듯이.

산수유는 중국의 산동땅에 많이 자란다. 산동은 황해로 쭉 뻗어 나온 반도 지역으로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옛날 산동 처녀가 구례로 시집을 왔는데 그때 산수유나무를 혼수로 가져왔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지리산 기슭의 구례 산동이라는 마을에 산수유가 많은 연유다. 그래서 중국의 산동과 구례의 산동 땅 이름이 같은 것이라는 설도 그럴싸하다. 중국 산동땅은 산수유 열매가 1천 5백년 전에 벌써 촉나라의 특산품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 산동 처녀가 구례로 시집 왔다는 것은 그럴 만한 연결고리가 있다. 중국 산동땅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태어날 때 몽골 반점을 띠고 나온다. 몽골 반점은 중국 사람들에게는 없다.

그 옛날 산동땅에 백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산동땅에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몽골 반점을 띠고 태어나는 우리 후손들이 지금도 거기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백제 처녀가 연고가 있는 백제땅으로 시집온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산수유는 한자 이름에 그 나무의 비밀이 숨겨 있다. 산수유 수(茱)자는 열매, 유(萸)자는 붉음을 뜻한다. 가을에 낙엽을 다 떨구고 붉은 열매들이 또 다른 꽃처럼 산수유 나무에 달려 있다.

열매도 꽃에 버금갈 정도로 예쁘다. 생으로 먹어도 된다고 한다. 약용으로, 특히 남성에 좋다는 둥 속설도 있다. 산수유를 혼수로 가져온 사정에 깊은 까닭이 있지나 않았을까.

부모님 집에서 나는 며칠 지내고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돌아설 때는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때 어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봄에 내색을 하지 않고 말없이 피어 있는 산수유꽃을 보고 있으면 머리에 수건을 두르신 고향집 어머니가 떠오른다.

해마다 봄이 와서 산수유 노란 꽃을 피우면 나는 고향 어머니를 만날 생각에 행복감을 미리 느낀다. “어머니, 오늘 산수유 꽃이 피었어요.” 며칠 전 귀가 어두운 어머니께 전화에 대고 큰소리로 내가 사는 마을의 봄소식을 전했더니 “뭔 소리냐. 여기는 벚꽃이 눈 내린 것처럼 피었다.” 하신다.

내가 사는 이 마을에도 오늘 벚꽃이 활짝 피었다. 이 봄에 산수유꽃을 보며 발걸음을 잠시 멈춘 사람은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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