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61) - 총리대신 김홍집과 정병하 · 어윤중이 살해당하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61) - 총리대신 김홍집과 정병하 · 어윤중이 살해당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2.02.07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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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2월 11일 아침,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이 맨 먼저 한 일은 경무관 안환에게 김홍집과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 장박 등 역적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었다.

덕수궁의 역사
덕수궁의 역사

이리하여 전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는 경찰에 체포되어 광화문 경무청 앞에서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피신하였으나 2월 17일에 고향인 보은으로 가다가 용인에서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외부대신 김윤식은 제주도로 종신 유배됐다.

한편 조희연, 유길준, 장박, 우범선, 이두황, 권영진, 이범래, 이진호 등은 일본 공사관으로 도피한 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을 읽어보자

“이때 세상에서는 김윤식과 어윤중을 청당(淸黨), 김홍집과 유길준은 왜당(倭黨), 이범진과 이윤용은 친러당으로 지목하였고, 이 3당이 갈아들면서 나라 꼴은 점점 말이 아니게 되었다.

아관파천이 일어나기 전에 고종은 헌정(憲政 갑오개혁)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하여 이범진, 이윤용 등과 함께 러시아의 힘을 빌려 김홍집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러시아인들도 조선을 차지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엿보다가 일본이 그들보다 먼저 선수를 치자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한편 아관파천은 일본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는 “임금을 빼앗겼으니 이제 만사는 끝장이다.”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2월 11일에 고종은 미리 준비한 조칙을 내렸다.

"8월의 변고는 만고에 없었던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하였으며 왕후가 붕서하였는데도 석 달 동안이나 조칙을 반포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다행히 천벌이 내려 우두머리(김홍집과 정병하를 말함)가 처단당한 결과 나라의 예법이 겨우 거행되고 나라의 체면이 조금 서게 되었다. 생각하면 뼈가 오싹하고 말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만약 하늘이 종묘사직을 돕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어찌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역적 무리들이 물들이고 입김을 불어넣은 자들이 하나둘만이 아니니 앞에서는 받들고 뒤에서는 음흉한 짓을 할 자들이 없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

을미년(1895) 8월 22일 조칙(詔勅 민왕후를 서인으로 강등시킨 조칙)과 10월 10일 조칙(민왕후의 위호를 회복시킨 조칙)은 모두 역적 무리들이 속여 위조한 것이니 다 취소하라."

(고종실록 1896년 2월 11일 5번째 기사)

한편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그동안 은신 중이었던 정동파 인물들을 대거 내각에 등용되었다. 내각총리대신에 김병시, 궁내부 대신에 이재순, 내부대신 박정양, 외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윤용, 법부 대신과 경무사 겸임 이범진, 학부대신 서리 윤치호, 농상공부 대신 서리 고영희, 경무사에 안경수가 임명되었다. 그런데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김병시가 강력 사양하자 박정양이 내각총리대신 서리를 하였다.

새 내각은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단발령을 철회하였고, 백성들이 미납한 조세도 탕감하는 조령을 내렸다.

2월 13일에 고종은 백성들에게 윤음(綸音)을 내렸다.

"그저께(2월 11일) 일은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의 우두머리와 반역 무리들의 흉악한 음모와 교활한 계책의 진상이 숨길 수 없게 되자 막아버리고 승복시키는 방도가 혹 허술한가 걱정하여 외국에서 이미 시행한 규례대로 임시방편을 써서 짐이 왕태자를 데리고 대정동(大貞洞)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에 잠시가 있는 뒤에 왕태후는 왕태자비를 데리고 경운궁으로 갔으며 짐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모든 범인을 잡게 하고 그들이 묶인 다음에 곧 돌아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범인을 묶을 때에 우민(愚民)들이 폭동하여 갑자기 살해하고 나머지 범인은 모두 다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쳐버리니 군중의 심리가 더욱 흉흉하여 안정되지 않고 있다. 이때를 당하여 짐이 있는 곳을 너희들 백성들에게 명백히 알릴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대궐이 무사하고 민심이 여느 때와 같게 되었으니 짐이 경사스럽고 다행하게 여기는 바이다. 며칠 안으로 장차 대궐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확실하게 알리니 너희들 백성들은 각각 의심을 풀고 생업에 안착하라."

(고종실록 1896년 2월 13일)

그런데 며칠 안으로 환궁하겠다는 고종의 윤음은 새까만 거짓말이 되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375일간 피신하다가 1897년 2월 20일에 환궁했다. 그것도 더구나 고종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미국·러시아 공사관이 인접한 정동의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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