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60) - 단발령과 아관파천(俄館播遷)
조선, 부패로 망하다 (60) - 단발령과 아관파천(俄館播遷)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2.01.24 1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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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1월 15일에 고종은 단발령(斷髮令)을 선포하고, 왕세자(나중의 순종)와 함께 솔선하여 단발하였다. 11월 16일에 정부 관료와 이속, 군인·순검 등이 단발하였다.

경복궁  영추문
경복궁 영추문

또한 고종은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기하여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고 1896년 1월1일부터 태양력을 사용했는데, 1896년 양력 1월 1일 새해 첫날에 순검들은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에서 강제로 백성의 머리를 잘랐다.

“외국 사절은 새해 첫날에 궁전에 출입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마꾼들이 머리 잘리는 것을 꺼려 했기 때문이다. 상투가 떨어지자 조선 사회는 온통 흔들렸다. 어떤 아버지는 두 아들이 머리를 자르자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고, 서울에 올라왔다가 머리가 잘린 농부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비숍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집문당, 2015, p 377)

조선 사회는 “신체·머리털·살갗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서,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는 말 그대로, 머리를 길러 상투를 트는 것이 인륜의 기본인 효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백성들은 단발령을 심각한 박해로 생각했고, 단발은 ‘일본화’로 받아들여져 반일 감정으로 이어졌다.

이러자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춘천에서는 관찰사가 단발령을 집행하려고 하자 군중들이 일어나 그를 죽이고 춘천과 인근 마을을 접수했다. 이에 김홍집 내각은 서울의 친위대를 파견하여 각지의 의병을 진압하였고, 경복궁 수비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

이 틈에 이범진을 비롯한 친러파들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는 계획을 세우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긴밀히 접촉했고, 1896년 양력 2월 11일 아침에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났다.

오전 7시 고종과 왕세자가 궁녀로 변장하여 엄상궁(영친왕의 친모)과 김상궁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나왔다. 이들은 곧장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은 고종과 두 상궁, 이범진과 이완용 등 정동파와 러시아 공사 스페이어와 베베르의 합작품이었다. 1895년 11월부터 전국적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진위대(鎭衛隊)에게 의병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기대에 못 미치자, 중앙의 친위대(親衛隊) 병력까지 동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서울과 궁궐 경비에 공백이 생겼고, 이 기회를 틈타 상해에 머물던 이범진이 비밀리에 귀국하였다. 그는 러시아 공사관에 은신하면서 고종의 밀사인 엄상궁과 수시로 연락을 취했다.

1896년 1월 8일에 주일러시아 공사관 서기관인 스페이어가 멕시코 공사로 발령받은 베베르의 후임으로 서울에 부임했다. 그런데 러시아 정부는 베베르의 멕시코 공사 부임을 일단 중지하고 서울에 계속 머무르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3월 1일에 스페이어가 주일공사관 대리, 베베르가 다시 주한 러시아 공사로 발령받을 때까지 거의 두 달간 함께 근무했다.

1월 12일에 스페이어 공사가 신임장을 제출하기 위해 경복궁에서 고종을 알현했다. 이 때 고종은 자신의 불안한 처지를 하소연하는 비밀 메모를 스페이어의 주머니에 몰래 집어넣었다.

이에 두 러시아 공사는 러시아가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러시아 정부에 보고하면서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하지만 러시아 외무성은 이를 거절했다.

2월 2일에 고종은 ‘나와 세자는 언제 피해를 당할지 모른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싶다.’는 친서를 엄상궁을 통해 이범진에게 보냈다. 이범진은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두 러시아 공사를 설득했다. 며칠 후 두 공사는 러시아 정부에 고종의 처지를 보고했다. 이러자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군함의 제물포 입항을 명령했다. 경험이 풍부하고 예의 바른 베베르와 과단성있는 스페이어의 공동 작업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2월 10일에 러시아 공사는 러시아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인천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에서 수병 100여 명을 포 1문과 함께 서울로 불러들여 공사관 주변을 경비하게 했다.

이때 고종은 미국 공사 알렌에게 파천 계획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자, 알렌도 물밑에서 도왔다.

이범진등 정동파는 수시로 대궐 밖을 출입했던 엄상궁과 김상궁의 가마를 타고 몰래 경복궁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경복궁의 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궁녀의 가마는 관례적으로 검문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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