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59) - 춘생문 사건
조선, 부패로 망하다 (59) - 춘생문 사건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2.01.17 0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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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5일 만인 1895년 8월 25일에 고종은 엄상궁(1854∽1911)을 입궁시켰다. 엄상궁은 대한제국이 탄생한 지 8일 후인 1897년 10월 20일에 영친왕을 낳은 엄귀비이다.

경복궁 영추문
경복궁 영추문

먼저 황현의 『매천야록』부터 읽어보자,

“전(前) 상궁 엄씨를 불러 입궁토록 했다. 민왕후가 생존해 있을 때는 고종이 두려워하여 감히 그녀와 만나지 못하였다. 10년 전 고종은 우연히 엄씨와 정(情)을 통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민왕후가 크게 노하여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고종의 간곡한 만류로 목숨을 부지하여 밖으로 쫓아 냈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그녀를 불러들였는데 변란이 있은 지 불과 5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고종이 이같이 쓸개 빠진 짓을 하여 도성 사람들이 모두 한탄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국역 『매천야록』 제2권 (1895년) ③, 11. 상궁 엄씨의 입궁)

엄상궁은 5세 때 입궁하여 민왕후를 모시던 중 고종의 승은을 입은 것이 발각되어 민왕후에 의해 쫓겨났다가 을미사변으로 입궁하였다.

황현은 엄비의 입궁에 대하여 혹평 하고 있다. 하지만 고종은 독살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쌓여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민왕후의 어의 언더우드 부인(1851∽1921)은 1904년에 지은 <상투잽이의 나라에서의 15년>에서 이렇게 적었다.

“고종은 한동안 자기가 보는 앞에서 딴 깡통 연유나 날달걀 요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럽 공사관의 부인과 언더우드 부인은 특별히 음식을 만들어 임금에게 보냈다. 이 음식들은 놋그릇에 담아 예일 자물쇠(미국인 예일이 발명한 원통형 자물쇠)에 잠가 보냈다. 공사관과 대궐 사이의 연락과 통역 일을 맡고 있던 언더우드 씨는 어떤 때는 하루에 두 번씩 열쇠를 가져다 임금에게 건네주었다.”

(릴리어스 호톤 언더우드 지음 · 김철 옮김,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 2008, p 195-196)

그런데 친왕파들은 고종을 경복궁에서 구출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시종원경 이재순, 시종 임최수, 탁지부 사계국장 김재풍, 중추원 의관 안경수 등이 모의하고, 정동파 관료 이범진·이윤용·이완용·윤웅렬 등이 관여했으며, 친위대 제1대 소속 중대장 남만리, 제2대 소속 중대장 이규홍 이하 수십 명의 장교가 가담하였다.

여기에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언더우드·에비슨·헐버트등 미국인 선교사, 다이 등 미국인 교관도 거들었다.

이들은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미관파천’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이를 <춘생문 사건 春生門事件>이라 부른다.)

<춘생문 사건>은 1895년 10월 11일(양력 11월 27일) 저녁부터 10월 12일(양력 11월 28일) 새벽까지 진행되었는데, 1895년 11월 15일자 ‘고종실록(이재순 등에 대한 판결 선고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시종 임최수는 이도철, 홍병진, 이충구, 이민굉 등과 음모하여 10월 11일 저녁에 같은 무리 30여 명을 훈련원에 모아 놓고는 고종을 동소문(東小門) 밖에서 맞이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도철과 이민굉은 동별영으로 먼저 달려가 친위대 제1대 중대장 남만리와 제2대 중대장 이규홍를 위협하여 군사를 동원시켰다.

800여 명의 구 시위대 병력은 이도철의 지휘하에 동별영을 출발해 건춘문 앞을 거쳐 태화궁에 진을 치고 춘생문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춘생문은 열리지 않았다. 사전에 춘생문을 열어주기로 했던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가 배신했기 때문이다. 이진호는 군부대신 서리(署理) 어윤중에게 밀고했으며, 첩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이도철·남만리·이규홍 등과 구 시위대 일부 병사가 춘생문 담을 넘어 돌격했으나 대기하고 있던 친위대와 일본 수비병에 생포되고 말았다.

선봉대가 무력화된 이후 군부대신 서리 어윤중의 원대복귀 설득에 따라 구 시위대 병력도 병영으로 철수하면서 춘생문 사건은 실패했다.

그 후 관련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은 뒤 특별법원에 넘겨져 11월 15일 재판관들로부터 형을 언도받았다. 임최수와 이도철은 교형(絞刑), 이민굉·이충구·전우기·노홍규는 종신유형(終身流刑), 이재순·안경수·김재풍·남만리는 태형(笞刑) 100대에 징역 3년에 처했다.

한편 거사가 실패하자 이완용, 이윤용,이하영 등은 미국 공사관으로, 이범진 · 이학균 등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일본측은 ‘춘생문 사건’에 서양인이 직접·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대서특필하였고, 이를 기회로 삼아 1896년 1월 20일에 히로시마 지방재판소는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 중이던 미우라 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 조선 군부 및 궁내부 고문관 등 48명의 을미사변 관련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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