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리비도 경제학'
월드컵의 '리비도 경제학'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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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얘기할 것 없이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 가령 사랑에 빠진 대학생의 성적 같은, 춤바람난 중년 부인의 장바구니 같은, 혹은 바깥 세상과는 담을 쌓은 채 책 속에 몰두해 버린 노학자의 부부생활과 같은…….

성적은 떨어지고, 장바구니는 헐렁해질 것이며, 사모님은 가득찬 불만으로 볼이 멘다. 한 대상에의 '몰두'란 항상 다른 대상에의 '무관심'과 병행한다는 사실, 이 단순한 진리를 그럴듯하고 알쏭달쏭하게 풀이한 것이 '리비도 경제학'이다.

'몰두'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심리적 에너지, 즉 리비도가 한 대상에만 집중하는 현상이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리비도의 집중 현상을 '카덱시스'라고 불렀다.
한 대상에 대한 과도한 카덱시스는 리비도의 절대량을 그 대상으로만 향하게 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주변의 다른 대상들에 투여되어야 할 리비도의 양을 감소시킨다.

사랑에 빠진 대학생은 책에도 돌려주어야 마땅한 리비도를 연애에만 쏟는다. 공부가 될 리가 없다. 춤바람난 중년 부인은 장바구니에도 돌려주어야 할 리비도를 춤추느라 너무 많이 소모해 버린다. 부부생활을 위해 남겨두어야 할 리비도 에너지를 책 속에 다 쏟아부어버렸으니, 노학자의 사모님이 불만인 것은 당연한 이치다.

어쩌면 자폐증이나 편집증의 메커니즘도 이와 같을 지 모르겠다. 정상인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집중력과 동시에 그들의 사고 밖에 있는 대상에 대한 지독한 무관심.

가령 영화 {레인 맨}의 자폐증 환자 더스틴 호프만은 실수로 쏟아진 수백 개의 성냥개비 숫자를 순식간에 맞추고, 거의 모든 채널의 TV 프로그램 시간대를 다 외우고 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자신이 살아가야 할 대상 세계의 규칙에 대해 마음을 닫아 버린다. 숫자에 쏟아 붓는 과도한 리비도가 다른 일상으로부터 거의 모든 리비도를 철회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피버노버

그러고 보면 이즈음 우리는 모두 환자다. 지름이 채 30cm도 안 되는 동그란 모양의 바람든 가죽 뭉치에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리비도를 쏟아 붓고 있으니 말이다.
어떤 이는 그 가죽으로 된 물건을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16번째로 잘 가지고 논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분신을 기도했다(이 글을 쓰는 지금 놀랍게도 한국은 세계에서 그 물건을 최소한 8번째로 잘 가지고 논다는 사실을 입증해 놓은 상태다).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는 그 공을 제일 잘 가지고 논다는 23명의 '태극전사'들의 모습을 보며 마시고, 괴성을 지르고, 기뻐 날뛰며, 밤을 새워 거리를 싸돌아다닌다. 실제로 그 감격을 이기지 못해 심장이 폭발해 버린 사람도 있단다.
'공'은 참 행복하겠다. 4천 7백만의 리비도 에너지를 몽땅 차지했으니 말이다. 지구상의 어떤 물건도 그런 사랑(리비도 집중)을 받아 본 적은 없을 줄 안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하나의 대상에 대한 과도한 리비도 집중은 다른 한편으로 다른 대상들에 대한 필연적인 무관심을 낳는 법. 우리 모두 그 동그란 '공'에 열렬한 사랑을 고백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가?

김승옥의 소설 한 구절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밤 사이에 진주한 군대처럼' 서남단 일부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을 푸른 기운이 '한나라'로 만들면서 점령해 버렸고, '홍삼트리오'의 전국 순회공연은 소문만 무성한 가운데 유야무야 취소되었으며, 한 때 공만큼이나 강력한 리비도 집중의 대상이었던 '노무현'에 대한 집중률 또한 26%대로 하락했다. 급기야 그는 보궐 선거 후 재경선 의지까지 밝혀야만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다른 데 있는 지도 모른다. 마치 공에 대한 사랑으로 한 국가 전체가 '하나'가 될 수 있으며, 되고 있다는 그 믿음. 그 후안무치의 이데올로기.
공이 아무리 둥글다고 세상이 그렇게 쉽게 둥글어질까? 사용자도 노동자도 남도 여도 노도 소도 우도 좌도 다 둥글둥글 하나되는 세상이 될까? 하나의 대상에 대한 모든 국민의 리비도 집중현상은 우리가 세계사를 통틀어 여러 번 목격했던 바 대개 '전체주의' '파시즘' 등과 같은 용어로 명명되고 있지는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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