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55) - 고부군수 조병갑과 탐관오리들
조선, 부패로 망하다 (55) - 고부군수 조병갑과 탐관오리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12.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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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월 10일의 고부농민봉기는 고부군수 조병갑(1844∽1911)의 탐학 때문이었다.

전봉준 동상 (서울 종각역 근처)
전봉준 동상 (서울 종각역 근처)

함양군수(1886년 4월-1887년 6월)등 여러 군데 군수를 한 조병갑은 거금 7만 냥을 바쳐 1892년 4월 28일에 고부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수탈에 나섰다. 임기가 3년이라지만 언제 발령 날지 모르는 것이 수령 임기였다.

조병갑은 고부 백성들을 수탈하고 괴롭혔다. 1) 농민들을 동원해 만석보를 쌓고는 처음 약속을 깨고 수세를 700석 거두었고 2) 황무지 개간 시 세금 5년 면제를 약속하고서 농민이 황무지를 개간하자 세금을 물렸다. 3) 논 3천 평당 세금을 쌀 100말이나 거두어 실제 국세보다 3배나 더 거두었고, 4) 백성들에게 불효 · 음행 · 잡기 등 갖가지 죄목을 엮어 옥에 가둔 후 돈을 받고서야 풀어주었는데, 그렇게 거둔 돈이 2만여 냥이었다. 5) 태인현감을 지낸 부친 조규순 공적비를 세우면서 1천냥을 뜯어냈고, 6) 대동미를 농민에게는 좋은 쌀을 징수하고 정부에 상납할 때는 나쁜 쌀을 사서 바쳐 그 차액을 착복했다.

특히 1893년은 흉년이 들고 전염병마저 돌아 농민들의 생활이 비참했음에도 조병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수탈했다.

이런 수탈을 견디지 못한 고부 농민들은 전창혁(전봉준의 아버지) · 김도삼 · 정익서가 주동이 되어 1893년 11월에 1차로 40명, 2차로 60명이 고부관아로 몰려가 수세(水稅)를 감해 줄 것을 진정하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몽둥이뿐이었다. 주동자들은 감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이러자 전봉준과 송두호 등 20명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무력봉기를 모의하였다. 통문에는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의 머리를 벨 것, 무기창고와 화약창고를 점령할 것, 군수에게 아부하고 백성을 수탈한 아전을 쳐서 징계할,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나아갈 것“등이 적혀 있다.

그런데 11월 30일에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이 나자 봉기는 무산되었다. 영의정 조두순의 조카였고, 이조판서 심상훈과 사돈인 조병갑은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줄을 대어 1894년 1월 9일에 다시 고부군수로 유임되었다. 그가 익산군수 발령 후 39일 동안에 6명이 고부군수로 임명되었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은 것이다.

마침내 1월 10일 밤에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들은 말목장터에서 봉기하여 11일 새벽에 고부관아(지금의 고부초등학교)를 쳐들어갔다. 낌새를 알아차린 조병갑은 이미 전주로 도망치고 없었다.

그런데 수탈은 조병갑만이 아니었다. 양전 사무를 맡은 호남 균전사 김창석과 세곡 업무를 담당한 전운사 조필영, 그리고 전라도 관찰사 김문현도 마찬가지였다.

1890년 12월 30일에 고종은 전 승지 김창석을 호남 균전사(均田使)로 삼았다. 균전이란 “전품(田品)의 공정한 사정에 따라 백성들의 부역을 균등히 하려 한다.”는 뜻이다. 김창석은 전주의 아전 집안으로 대대로 부유하여 농장 수입이 수 만석에 이르렀다. 그는 승지에 이르기까지 고종에게 상납한 돈이 수백만 냥이었다.

김창석이 호남 균전사가 된 당시 전라도는 2년간 흉년으로 가는 곳마다 황폐하였다. 그런데 김창석은 이 지역 출신임을 이용, 이미 개간된 땅까지도 진전이라 하여 이를 다시 개간한 것처럼 허위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국가에는 면세를 청하고 실제로는 징세해 착복했으며, 일부의 땅을 자기 명의의 토지로 전용하는 등의 부정을 자행하였다.

균전사 김창석의 수탈은 특히 고부가 심하였다. 1894년 갑오농민봉기 때 “균전사가 폐단을 없앤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폐를 낳는다.”라는 폐정 개혁(弊政改革) 요구 사항까지 나타났다.

이러자 1894년 5월 20일에 사과(司果) 이설이 상소를 올려 현재의 폐단을 논하고 전운사 조필영, 균전사 김창석, 전(前) 고부군수 조병갑, 안핵사 이용태, 전라 감사 김문현 등의 죄상을 규탄하였다.

5월 21일에 의정부는 전(前) 균전사 김창석이 백지징세(白地徵稅 농사짓지 않은 땅에 세금을 매김)한 것에 대해 공론(公論)이 들끓고 있으니 처벌하라고 하자, 고종은 윤허하였다. 이 당시 조병갑은 고금도에, 조필영은 함열현에, 이용태는 금산군에, 김문현은 거제도에 유배 중이었다.

9월 17일에 의정부가 균전사 김창석를 처벌하라고 다시 아뢰자 9월 19일에 고종은 김창석을 홍주목에 유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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